서가에서-서가엔 꼭 책이 있어야 할까

입력 2004-11-05 12:32:56

'서가'의 '서'는 '책을' 지칭하지만 실제 가정집 서가에는 책 말고도 으레 비디오도 쌓여 있고 사진액자도 놓여 있을 법한 일이다.

해서 '서가'란 말과 집 안의 실제 '서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서가'를 비켜가며 굳이 '책'이 아니라 '영화' 얘기를 하려는 구차한 변명으로 보이긴 하지만 양해를 구할 도리밖에 없다.

언어와 대상의 불일치는 서가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1998년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는, '리얼'이란 말의 이러한 불일치를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는 앤더슨이란 이름으로 통하지만 사이버공간 안에서 네오로 변한 인물. 우리는 '리얼하다'란 말을 잘 사용하긴 하지만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모피어스의 빨간 약을 먹고 사이버인간으로 탄생한 앤더슨은 네오라는 이름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앤더슨이 리얼한 인간인가, 아니면 네오가 리얼한 인간인가? 꿈 속에서 앤더슨의 몸안으로 들어간 전갈이 실제로 들어가 있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주인공 탱크와 그 프로그램에 따라 컴퓨터 안에서 네오와 모피어스가 결투를 한다.

'매트릭스'에서 리얼한 세계는 사이버공간 안에 있다.

'매트릭스'는 앤더슨과 네오, 컴퓨터의 밖과 안, 현실과 비-현실을 동시에 포괄하면서 네오/안/비-현실을 리얼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매트릭스'의 이러한 주장 여부를 떠나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다방커피 말고 더 비싼 인스턴트커피, 마약 성분이 빠진 대마초가 아니라 담배를 마시고 피우며 우리는 살아간다.

약초 등을 섞은 소위 건강담배의 그 허망한 맛에 대한 기억은 리얼리티의 부재 그 자체다.

순전히 장사속일 뿐이지만, 무알코올 맥주에는 알코올이 빠져 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이 이처럼 독한 뭔가가, 진하고 구수한 국물 같은 뭔가가 쏙 빠져 있는 듯하고 핵심 혹은 실체가 소멸해버린 곳이라면 단백질로 구성된 앤더슨의 몸에서 단백질이 빠져버린 네오가 더 리얼한 인간 아닌가. 나사가 쏙 빠진 세상에서 나부터 실체를 붙들고 사는 리얼한 인간인지 궁금해진다.

이득재(대구가톨릭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11월부터 '서가에서' 필자가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바뀝니다.

▨약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졸업 △'바흐찐과 타자'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가부장제국 속의 여자들' '혁명의 문화사' '러시아문학의 이해'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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