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지-'그들'만의 대학입시

입력 2004-11-01 11:37:23

얼마 전 서울의 한 유명 의대에 다니는 학생을 우연히 만났다.

기자가 그를 취재했던 고교 3학년 때 살집이 좋고 푸근해 보이던 그는 본과 진학을 앞둔 탓인지 푸석푸석한 것이 좀 말라 있었다.

그런데 내던지는 말이 더 힘겨워 보였다.

"입학하니 학생들 사이에 농담처럼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말이 떠돌더군요. 아버지가 우리 대학 의대 교수면 성골, 다른 대학 의대 교수면 진골, 집안이 상당한 부자면 6두품, 뭐 이런 식이었어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아버지가 대구의 한 중소업체 간부인 자신은 평민 축에 겨우 낀다며 학생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가로놓인 벽을 실감한 적이 여러 번이라고 했다.

입학할 때도 심층면접 관련 정보를 입수하지 못해 엉뚱한 준비를 했다가 어렵사리 합격했는데 의대 공부를 계속할수록 사소한 차별이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의대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권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도 이따금 들은 적이 있다.

출신 지역이나 가정 형편, 아버지의 직업 등에 따라 어울리는 부류가 갈라지기 때문에 어지간히 성격 좋거나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면 '시골 아이' 취급받기 쉽다는 얘기였다.

물론 아직은 극히 일부에서나 볼 수 있고, 차별이라는 것도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으니 호들갑 떨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2008학년도 대학입시 개선안을 뜯어보면 대학 입학 단계에서부터 이런 차별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새 대입안은 외형상 내신 비중을 높였다고 하지만 신뢰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학들은 이를 소홀히 취급할 게 분명하다.

수능마저 9등급으로 나눠져 변별력을 잃었으니 결국 당락은 논술이나 구술면접 같은 대학 자체의 평가에 의해 갈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학별 고사라도 열심히만 준비하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거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논술·면접은 대학들이 비중을 둘수록 고교 교육만으로 대비하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단순한 지력 측정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겪어보고, 이야기하며 성장했는가라는 개인의 총체적인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버스나 지하철 한 번 타면 유명 오페라나 연극, 전시회, 박람회 따위를 쉽게 볼 수 있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의 모든 중심이 자신의 가까이에서 펼쳐지는 수도권 학생들에게 지방 학생들은 어떤 강점이 있을까. 풍요의 느긋함 속에서 다양한 취미와 특기를 길러온 부유층 자녀들에게 서민층 자녀들은 생활의 건강함, 흙의 소중함 같은 걸 경쟁력이라고 내밀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들에 대한 평가를 담당하는 상위권 대학 교수들이 이미 수도권의 부유층이라고 자처하는 마당인데.

이쯤 되면 지나친 걱정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대학들은 벌써 고교가 스스로 내신의 신뢰도를 높이지 못하는 상황을 고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그들만의 대학입시를 강행할 준비를 갖추고서 말이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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