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진기자의 상주 곶감용 감따기·감깍기 체험

입력 2004-10-23 08:45:32

10월 23일은 상강(霜降). '한로상강(寒露霜降)에 보리 간다'는 속담이 있다.

가을걷이의 시작과 겨울농사였던 보리파종 시기가 왔음을 말해주는 속담이다.

하지만 상주에서는 '한로상강에 감 깎는다(곶감 만든다)'는 말로 바뀔 정도로 이 때부터 곶감 만들기가 본격 시작된다.

이미 상주는 제법 노랗게 익은 감따기와 감깎기가 곳곳에서 한창이다.

상주의 곶감농가를 찾아 서툰 감따기·감깎기를 체험했다.

상주 최대 곶감 생산단지인 '남장리 곶감마을'에선 전체 180여호 중에서 80여 농가가 곶감을 생산한다.

이 마을에서만 연간 323t이 생산돼 36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마을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감따기와 감깎기로 분주하다.

곶감농사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감따기. 감따기는 위험천만한 일이면서도 곶감농사의 성패를 기원하는 만큼 조심스럽다.

약한 감나무 가지가 부러질 경우 곧바로 큰 사고로 이어지고 또 감이 떨어져 상처라도 나고 꼭지가 떨어지면 곶감의 질은 장담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도 성급한 개구쟁이들이 뜰 안의 감나무에 올라 마구 흔들어대며 장난을 치고 있다.

지붕을 타고 올라가 곡예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감을 밑으로 떨어뜨리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허리를 숙여 가마니에 주워담는다.

산기슭이나 들녘, 밭둑에 선 감나무 주위에는 어른 10여명이 그물을 치고 나무에 올라 품앗이 감따기를 한다.

나무 아래쪽으로 검은색 그물망을 촘촘히 둘러친다.

바닥과는 상당한 공간을 두어야 감이 떨어지면서 상처를 입지 않는다.

나무 위에는 감나무타기 경력 수십년의 남자 어른 한명이 이 가지 저 가지를 아슬아슬하게 이동하면서 나무를 흔들어 감을 밑으로 떨어뜨린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떨어진 감은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주워 상자나 가마니에 담아 감깎는 작업장으로 옮긴다.

이제 본격적인 감깎기다.

감 농사 규모가 큰 집에선 기계로 감을 깎는다.

그러나 감나무가 서너 그루 밖에 없는 집에선 온가족이 마루에 걸터앉아 손으로 감을 깎아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이야기에다 감껍질 길게 깎기 경쟁이라도 붙으면 가을밤은 마냥 짧다.

상주시 남장동 '동이곶감'(대표 김상학) 마당이 분주하다.

동이곶감에선 연간 130여t의 곶감을 생산해 4억여원의 고소득을 올린다.

때마침 조연환 산림청장이 곶감산업 현황을 살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지금 사용되는 감깎는 기계(박피기)는 3인, 또는 4인이 한조가 돼 기계 1대에 매달린다.

우선 한명이 꼭지부분의 잎을 도려낸다.

그리고 한명이 기계를 이용해 몸통의 껍질을 벗겨내고 나머지 한명이 배꼽부분의 껍질을 손으로 깎는다.

이날 상주시는 조 청장에게 한명이 이 세 과정의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만든 신기술 박피기 200대를 지원해 줄 것을 건의했다.

김상학씨는 "겨울부터 이웃 농가들의 감나무를 계약해 일년간 비료를 주는 등 관리한다"며 "가을이 되면 인부를 사서 상주 곳곳에 흩어진 감나무에서 새벽부터 감따기 작업을 벌이고 감깎기, 감말리기 등을 통해 11월 초면 반건시 곶감이 나온다"고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상주시 낙동면 유곡리에 자리잡은 '삼백곶감' 농장으로 향했다.

감깎는 철이면 상주지역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몇가지가 있다.

하나는 식당 등에서 아주머니 일손을 구하기 어렵다.

식당에서 잡일을 하던 아주머니조차도 이때면 모두가 감깎는 곳으로 이직(?)하게 된다.

또 대부분 감깎는 작업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진행되다보니 각 가정마다 아침과 저녁을 얻어먹지 못하는 남편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난다.

감을 깎기 위해 덤벙대자 한 아주머니는 "올 곶감농사가 시원찮겠다"며 어설픈 도전에 핀잔을 준다.

농장주 김장희(38)씨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작업장으로 안내됐다.

벌써 그 곳에는 30여명의 아주머니들이 각자가 맡은 공정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생감을 컨테이너식 저울에 올려놓자 감 무게에 따라 5단계로 나눠 자동으로 분리된다.

기계 1대당 2명의 아주머니들이 감꼭지 부분을 도려내 합판을 이용해 만든 선반에 내리자 능수능란한 손짓의 아주머니가 받아 박피기를 이용해 순식간에 껍질을 벗겨낸다.

아래쪽에 앉았던 또 다른 아주머니는 몸통껍질이 벗겨진 감을 받아 배꼽껍질을 재빠르게 도려낸다.

한쪽에서는 꼭지가 없는 감에다 꼭지를 대용할 플라스틱 걸리대를 꽂고 또 다른 쪽에는 생채기가 나 물러버린 감을 골라내는 작업에 열중이다.

누구하나 시선은 주지 않으면서 입으로 한마디씩 거든다.

"쉽게 보면 큰 코 다쳐", "하루 일당도 분야별로 다 달라", "감깎는 곳에도 위계질서가 있거든. 그러니 신출내기는 깎은 감 중에서 불량품을 골라내는 일만 해"….

분분한 의견을 한 귀로 흘려듣고 감깎기를 고집했다.

그러자 인심좋은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이곳에서 해보라"며 자리를 양보해 준다.

간단한 작업방법을 소개받고 왼손으로 감을 들고 기계에 집어넣자 윙하며 감이 통째로 돌아간다.

순간 놀라 가만 있으니 "가만 있으면 어떻게 해, 칼을 들이대야 깎이지"라고 호통친다.

칼을 가져다 대자 껍질이 벗겨지고 노란 속살이 드러난다.

하지만 울퉁불퉁 감 모양이 엉망이다.

버려야 할 불량품이 돼 버린 것. 얼마나 버렸을까. 족히 50여개는 버렸을 때쯤부터 조금씩 모양새를 갖춘 감이 되는 듯했다.

10년째 감깎는 일에 나온다는 김재순(60·사벌면 묵하리)씨는 "감깎기가 끝나면 곶감포장까지 해 가을과 겨울 한철 일감으로는 이곳이 제격"이라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 좋아 해마다 참여한다고 했다.

윤순임(68·사벌면 삼덕리)씨는 "이곳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겨울도 나고 객지에 나가 있는 손자녀석들 장난감도 사준다"며 "내가 만든 곶감이 잘 팔리면 그것도 기쁜 일"이라고 했다.

깎은 감은 건조장에서 말린다.

감을 행거(유인줄)에 걸어 높은 천장에서부터 차례차례 매달아 놓는다.

곱게 깎은 감을 타래(건조대)에 줄지어 늘어놓으니 건조장 안이 온통 주황빛으로 변했다

상주에는 감나무 없는 집이 없다.

상주 감은 떫은 맛을 내는 둥시다.

의성의 사곡시, 경산과 청도의 반시, 고령의 수시와 달리 탄닌 함량이 많은 대신 물기가 적어 곶감재료로는 최고다.

올해는 감이 풍년을 맞아 곶감농사도 풍작이다.

감 품질도 좋아 더욱 맛난 곶감을 기대해본다.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사진: 박피기로 감을 깎는 작업은 족히 50여개의 감을 버려야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출 수 있다. 감깎기에 열중하고 있는 엄재진기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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