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문/가상르포-정조 임금의 능행

입력 2004-10-18 18:29:47

정조 임금이 능행(陵幸)을 자주 실시하고 있다. 명목은 선왕들의 능을 참배하는 것이지만 정조 임금의 능행은 상당부분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기 위한 것이다. 이런 귀기울임과 관련해 백성들은 정조임금이 성군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국왕의 현륭원(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 참배를 동행 취재했다.

-전문-

나팔소리가 크게 울렸다. 임금을 호위하는 장용위 병사들이 먼저 궁궐문을 나섰다. 창과 칼로 무장한 장용위 병사들의 모습은 늠름했다. 임금의 행렬이 남대문을 나서자, 좌우에 늘어서 있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호위 병사들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느라 진땀을 흘렸다.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임금을 쳐다보았다. 이전처럼 허리와 고개를 숙인 주눅든 모습이 아니었다. 행렬 사이에는 엿장수 등짐장수 봇짐장수들이 물건을 팔았다. 임금의 행렬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장사꾼들은 큰소리로 물건을 팔았다.

사람들이 임금의 행렬을 막고 저마다 억울한 사정을 고했다. 멀리 경상도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다. 토지를 빼앗긴 사연, 군역을 과중하게 진 사연, 이유 없이 갇히고 매를 맞은 사연 등이 쏟아졌다. 행렬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사람들을 밀쳐냈다. 그러나 임금이 병사들을 막았다.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러 나온 만큼 한마디라도 더 듣고 가겠다는 것이다. 임금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수행원에게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해 조치하라고 말한 후 행렬을 이동시켰다.

임금은 여전히 엎드린 백성들에게 고개를 땅에 처박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양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임금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한 노인은 "성군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볼거리를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몰려든 사람들을 살피고 그들의 사연을 듣느라 임금의 행렬은 느리게 움직였다. 예정보다 늦게 현륭원에 도착한 임금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고 하루를 묵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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