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삶-(6)티베트-사몌 사원(桑耶寺)

입력 2004-10-18 08:59:42

오전 여섯시, 하늘은 아직까지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조캉 사원은 여전히 순례자들의 느린 발걸음으로 새벽이 열리고 있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 사몌 사원에 가는 길이다.

조캉 사원 광장 앞에는 여러 사원들의 이름을 외치며 순례자들을 부르는 미니버스들이 분주하다.

사몌는 라사에서 170㎞ 떨어진 사몌 계곡에 위치한 사원으로 여행사에서 대여한 지프를 타고 4시간가량 달려 다시 배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강을 건너 또다시 30여분 정도를 더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먼 곳이다.

하지만 여행허가서를 볼모로 한 여행사들과 공안들의 횡포에 대한 짜증 때문에 검문이 있는 선착장을 피해 비록 2시간을 넘게 더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었지만 현지인들이 타는 미니버스를 탄다.

버스는 자리가 다 찰 때를 기다려서야 겨우 출발을 한다.

거의 모든 마을에서 멈추고 가기를 반복하던 버스는 돼지며 염소 등을 태우고 내리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좁은 자리를 양보하며 웃는다.

앞에 앉은 노인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흙먼지에 금세 흰 머리가 뿌옇게 되지만 창을 열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어 시간을 달렸을까? 집들이 드물어지기 시작할 무렵, 설산을 병풍처럼 세운 얄룽창포(雅魯藏布·Yarlung Tsangpo) 강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난다.

얄룽창포는 설산의 빙하가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강으로 인도를 지나 방글라데시까지 흐르는 그 길이가 2천900㎞에 달하는 긴 강이다.

불교의 발전을 위해 구린 린포체('소중한 스승'이라는 뜻)라는 인도의 승려를 모셔와 지었다는 사몌, 그가 왔던 길을 따라 흐르는 눈부신 강, 또 그 강의 얕은 모래톱에 반짝이는 모래알은 수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인연의 매듭이다.

미니버스는 강을 아래로 하고 힘겹게 계곡을 오른다.

짐을 잔뜩 실은 트럭이 메마른 흙먼지 언덕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다.

안간힘을 쓰며 트럭을 밀던 사람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손을 흔든다.

야크를 키우는 유목민들이다.

황량하고 척박한 땅 위에서 말 못하는 야크와 함께 살아가기에 사람이 그리웠을까? 외로운 여행자의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웃음에는 진한 외로움이 묻어난다.

끝없는 황무지를 지나 작은 마을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사몌 사원이다.

다른 사원에서는 보지 못한 우리네 사찰의 당간 지주(사원의 깃발을 매달아 두는 기둥)처럼 보이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위에 불경을 새긴 천들이 감겨져 있다.

붉고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사원 입구로 들어서자 네모난 담을 따라 마니차가 세워져 있다.

마니차를 돌리며 법당 주위를 돌다가 빨래를 하고 있는 젊은 승려를 만난다.

그의 곁에서, 우물에서 막 퍼 올린, 얼음처럼 차디 찬 물에 손을 담그면서 어쩌면 그가 헹구고 있는 것은 승복이 아니라 번뇌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또다른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몸에서 묻어나는 때를 가장 더러운 것으로 여겨 평생을 빨래만 하는 천한 직업을 만든 힌두교, 하지만 오히려 그 정화를 자신의 수행으로 삼는 불교, 옳고 그름을 떠나 출발이 다른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사몌 사원은 우리의 불국사처럼 그 자체가 불교의 우주관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독특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4층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대법당은 불교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나타내고 법당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四方)의 다른 색깔의 스투파(탑)는 4개의 대륙을 상징한다.

또한 대법당은 이 사원이 티베트 최초의 사원으로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입증하듯 1, 2층은 티베트, 3층은 인도, 4층은 중국 양식으로 되어 있다.

'비어 있음', '의미 없음', '바랄 것 없음'을 상징하는 3개의 문을 지나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1, 2층이 하나로 되어있는 구조로 거대한 석가모니불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나무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오르자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량무변의 수행을 쌓아 깨달음을 얻은 부처(報身), '빛나는 것'을 뜻하는 비로자나불이 어둠 속에서 신비하다.

다른 층과는 달리 중앙에 불상들이 모셔 있는 4층을 둘러보던 동양인 여행자들이 당혹해하고 있다.

부처가 여인을 끌어안고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의 남녀교합상(男女交合像) 때문이다.

낯설긴 하지만 티베트 불교가 인도의 영향을 받은 증거로 8세기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요가를 통해 해탈을 얻고자 한 불교 유파의 수행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의 이원적 대립을 통일하여 해탈을 이루려는 수행으로 음양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성적 결합이 권장되기도 하면서 세상의 호기심은 밀교(탄트라)라는 은밀한(?) 오해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몸에 들끓고 있는 욕망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여 해탈로 가자는 것이다.

성을 외면하거나 방해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솔직함이 있다.

인도의 카주라호(Kajuraho) 지역의 사원에 새겨진 수 많은 성행위 부조가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이유가 또한 그것이다.

"부처가 섹스라니요?"

석가모니가 위대한 까닭은 누리던 것, 즉 가진 것을 버린데 있음을 말해 보지만 일본 여자 여행객은 고개를 내젓는다.

도대체 성이란 무엇인가? 사는 자의 쾌락만이 목적인 매매된 성은 부끄러운 것이다.

또한 사랑이 없는 단순한 쾌락만이 추구된 배설의 욕구인 성은 허무하다.

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이 확인되는 아름다운 성, 생명을 잉태하는 성, 남녀교합상의 부처가 세월을 넘어 온 여행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이거늘 세월은 관습을 낳고 그 관습은 믿음을 잃고 만다.

나른한 오후, 사원의 4층 난간에서 바라다 본 하늘엔 낮달이 무심히 떠 있다.

해와 달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모래 위에 홀로 핀 선인장 사몌가 안고 있는 풍경이다.

라사로 돌아오는 길, 세칭 도리구치 모자로 한껏 멋을 부린 미니버스의 젊은 조수는 앞자리에 아가씨 둘을 태우고 신이 나있다.

체탕(澤當·Tsethang)이라는 도시를 돌아 라사로 오는 버스에 이방인이 탄 것이 신기한 듯 가끔 뒤를 돌아보며 엄지를 세우다가도 아가씨들과 연신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린다.

젊음이란 이렇듯 낯선 만남조차도 닻을 내리게 한다.

미니버스는 티베트 창조신화의 발상지라는 체탕 지역의 두 곳에서 꽤 오래 정차를 한다.

첫 번째 정차한 곳은 송첸캄포 왕이 호수에 사는 5마리의 용을 물리치고 세웠다는 트란드룩 사원(昌珠寺)으로 입구에 있는 거대한 마니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사원을 부처께서 탓하시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화장실이라는 뜻의 측소(厠所)를 찾았다가 도저히 발을 떼어 놓을 수 없는 풍경에 기겁을 하고 포기하고 만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괴로움 중의 하나다.

두 번째로 정차한 곳은 윰불라강(Yumbulagang)이라는 곳이다.

티베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최초의 왕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 세웠다는 창조 신화와 관련된 탓인지 산꼭대기에 지어져 있다.

화려한 치장을 한 야크와 나귀가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길은 가파르진 않지만 좁고 꽤 길다.

세월에 빛바랜 룽다가 바람에 찢겨져 나부낀다.

나라를 잃은 자손들에게 위대한 왕이 다시 강림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땅을 잃고도 묵묵히 순례의 길을 걷는 후손들에게 화를 내지나 않을까? 녹슬어 망가진 마니차가 쓸쓸하기만 하다.

사몌를 출발한 지 거의 아홉 시간이 지나서 도착한 라사는 이미 어둠이 깃들어 있고 그 익숙함 만큼이나 떠남은 가까워지고 있다.

증축 공사로 담을 허물었는데도 숙소의 두터운 문은 굳게 닫혀 있다.

PC방을 지키던 종업원이 무너진 담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는다.

그녀에게도 담을 잃은 닫힌 문이 말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버스 운전기사를 하는 남편을 따라 라사로 들어왔다는 그녀는 여행자의 국적을 묻고는 한국 가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꿴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나라 여행자에게 한류는 오히려 부끄러움이다.

허나 그것에 아랑곳없이 그녀에게는 스물 한 살 처녀의 앳됨이 아직도 묻어난다.

전태흥(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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