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문화 정체성을 생각하며

입력 2004-10-16 10:24:19

바람이 선선한 이즈음은 연중 길에 나서기가 제일 좋은 철이다.

한가한 시골길. 단풍의 초입에 들어선 나무들의 모습이 보기 좋고 키 높이로 잘 자란 코스모스들과 실컷 눈을 맞출 수도 있다.

도로 한쪽에 멍석을 깔고 고추나 토란대를 말리는 아낙들의 모습이 수더분하고 산비탈 논의 벼가 햇살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가슴을 꽤 설레게도 한다.

한국미의 중요한 관점의 하나는 알려진 대로 '선의 미'이다.

휘어진 고갯마루와 그곳을 지키는 등 굽은 소나무들. 구불구불한 논배미와 장독대의 허리 불룩한 항아리들. 평생 농사일을 한 농부의 등과 만월. 백자나 청자의 선들.

그 중에서도 대표성을 지닌 것은 아마도 초가지붕의 선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네 시골마을에서 초가지붕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낙안 읍성 민속마을에 보존되어 있는 초가들의 모습은 한국의 선의 미를 유추하기에 충분한 여유가 있다.

백여 채의 초가지붕들이 서로 추녀를 마주 대고 있는 모습은 주위의 얕은 산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되새김질하는 소들이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사는 마음 착한 사람들의 삶의 냄새를 넉넉히 풍기게 한다.

묵은 먹기와 집 또한 '선의 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양쪽의 망와를 향해 올라가는 용마루의 선, 추녀와 부연의 은근한 선의 미는 마치 '외씨보선'의 그것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암키와와 수키와의 교직으로 이루어진 지붕의 물결 무늬들이 새겨볼 만하며 기둥의 원만한 둥근 선의 눈 맛은 이곳에 펼쳐질 삶의 여유와 보편적인 정서를 짐작게도 한다.

아쉽게도 우리의 전래 마을들에서 이러한 전형성을 지닌 풍경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활의 효용성과 편리성, 겉으로 드러나는 멋들을 따지는 세태 속에서 그 명맥이 끊긴 탓이다.

문화현상이라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볼 때 사라져가는 풍경들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 아쉬워 할 필요는 없겠지만 급격히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이런 풍경들의 변화는 '기댈 언덕'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안타까움을 준다.

연중 길을 걷기 제일 좋은 요즈음, 길 위에서 한없이 마음이 어두워지는 풍경이 있다.

나라 안 곳곳에 들어서는 전원주택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도시에서의 시멘트 문화에 질린 사람들이 시골 땅에 집을 짓고 재충전과 여백의 시간을 지니려는 데 대해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철학의 빈곤에 있다.

주택의 형식이나 기능은 당연히 그 주택이 들어설 땅의 역사나 기후, 토양, 문화들과의 적절한 상호 교감의 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중해의 해변 마을이나, 미국 서부의 사막지대 도시 위에 세워진 집들이 우리 땅에 버젓이, 자연스레 자리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 땅에 새로 지어지는 집들의 모습은 기왕의 우리 지형이나 삶의 토양들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아치형 창문을 주렁주렁 매단 뾰족지붕의 집들이나 하얀 통나무집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우리의 전원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원자재가 거의 수입품으로 이루어져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난은 논외로 치자.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에 색색의 뾰족지붕이나 통나무집들로 범벅이 된 우리의 전원 풍경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한 문화의 소멸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잉태한다는 문화 변증법은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계통 없이 성립된 문화의 폐해를 감당할 후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퍽 아파지는 것이다.

외래문물의 수용에 있어 문화정체성의 확보 여부는 한 민족문화 성립의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곽 재 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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