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기술의 벽을 넘어

입력 2004-10-13 15:50:41

1981년이었을 것이다. IBM이 PC XT 모델을 발표하면서 애플II가 장악하고 있던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막 진입할 때였다. 그 때 해외 잡지를 뒤적거리던 나는 정말 감동적인 광고 하나를 보았다. 애플사의 광고였는데 'Welcome IBM'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고 그 아래 한 입 베어먹은 사과 하나가 달랑 그려져 있는 광고였다. IBM이 PC 시장에 진출해도 애플은 자신 있고 오히려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IBM이 퍼스널 컴퓨터의 시장을 키워주기를 바란다는 당당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자신감의 표시였다.

그러나 IBM이 플랫폼을 개방하면서 수많은 IBM형 PC 생산업체를 만들며 전방위로 애플을 압박하고, 이에 맞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Mac이란 신개념의 PC를 선 보이며 Mac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지금의 MS윈도 운영체제의 기틀을 만들었지만 대주주들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 후로부터 애플은 독창성의 유지와 대중화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PC시장의 주도권을 IBM진영에 완전히 내 주고 열광적인 Mac 매니아층만 남기고 대중으로부터는 전설처럼 잊혀 갔다.

여기까지는 IBM과 그 진영의 일방적인 승리로 보인다. 그러나 인생이란 항상 역전이 있어서 사는 재미도 지켜 보는 재미도 있는 것이다. IBM이 추진한 개방전략은 다시 그 대가를 받게 되는데 동일한 플랫폼으로 수많은 업체들이 비슷비슷한 IBM PC를 생산하고 이에 따른 과당 경쟁으로 결국 PC를 부가 가치가 없는 사업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반면에 퇴출 12년 만인 1997년 애플로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다시 화려한 APPLE LOOK을 선보이며 단숨에 Apple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가 한국에서 선 보인지 거의 5년 뒤에 뒤늦게 하드디스크형 MP3인 iPod를 출시하면서 특유의 Apple Look으로 단숨에 전세계 시장을 석권해 가고 있다.

IBM식 전략이 맞는지 스티브 잡스의 고집이 맞을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아직도 게임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PC의 대중화와 표준화로 여전히 수혜를 받는 곳은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처럼 표준을 장악한 회사들이란 것이다. 애플은 이런 점을 미리 간파하고 Mac 운영체제를 애플 중심으로 표준화하고자 했지만 IBM진영의 수와 힘에 밀려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기술의 차이와 선점이란 것은 별로 대중적 호응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애플 컴퓨터가 기사 회생한 것은 기술의 진보성이 아닌 스티브 잡스의 고집이 담긴 애플류의 맛과 멋이었다. 대부분의 PC업체들이 부가가치 저하로 쇠락해 갈 때도 애플이 다시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 아니고 애플의 옛 멋을 되찾은 것이며 다시 열광하는 애플 팬들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디지털 산업의 미래를 본다. 디지털 산업의 큰 변화의 물결은 가정용 전자기기가 개인용으로 진화해 가는 과정이다. 거실에 온 가족의 공유물로 있던 전화기와 오디오가 개인용 휴대전화와 MP3 플레이어로 진화되었다. 앞으로 TV나 VCR 게임기도 개인 휴대용으로 진화해 갈 것이다. 이제는 드라마조차도 20'30대 남녀 등으로 콘텐츠 자체가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가정용 기기가 내구성, 실용성, 기능을 중시하게 되는 데 비해 개인용은 차별성이나 감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의 멋과 취향을 대중 앞에서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디자인의 훌륭함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특유의 멋과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첨단 기술이다.

디지털에서의 하드웨어적 기술이란 플랫폼이 금방 표준화되면서 소구점이 있기 마련이어서 어느 단계가 되면 PC처럼 모두가 엇비슷해진다. 여기에서 차별화되고 부가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요소는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여 트렌드를 이끌고 유행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표준화의 주도권을 잡기도 요원하고 가격 경쟁력을 갖기도 어려운 우리의 전자산업 현실에서 이것만이 지속적으로 부가 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디지털의 게임은 차원이 다른 게임이다. 이제 소니가 본격적으로 MP3 플레이어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Welcome Sony'

양덕준·(주)레인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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