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호주제와 가족

입력 2004-09-02 09:38:09

한국의 가족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이혼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현재 가족의 모습은 남성(남편)부양자와 피부양자인 여성(아내)과 자녀로 구성된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와 기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 미혼 1인 가구, 이혼한 한부모 가족, 재혼가족, 노인단독가구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하고 있고 가족에 대한 범주 설정도 가족의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현행 민법에서는 가족의 범위를 '호주의 배우자, 혈족과 그 배우자, 기타 민법의 규정에 의하여 입적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호주를 승계하는 순위까지 정해 놓았다.

아들-딸-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정해서 남계혈통의 가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가족은 호주제로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제를 통해 가족을 정의하고 가족문화를 형성해 온 민법은 개정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도 이러한 가족의 변화를 인정하고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 원칙에 따라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주요 골자를 보면 호주 관련 조항을 전부 삭제하고, 자녀의 성은 아버지성을 윈칙적으로 따르되 부부합의시 어머니성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재혼가족의 경우 계부의 성으로 성을 변경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호주제 폐지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호주제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호주제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으로 가족을 유지하는 뿌리라고 보고 있으며 자녀성은 부계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성을 강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호주제도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이 아니라 일제가 이식시킨 제도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조선의 가족제도를 일본 천황제의 하부구조로 만들기 위하여 일본 무사계급 내의 상속제도였던 가독상속제를 호주제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강제이식하여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가족정책의 핵심은 일본식 '가'제도의 이식이었다.

일제가 가족단위로 신분등록제를 실시한 것은 징세, 징병, 치안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조까지 '가'의 관념은 없었고, 세원 확보와 요역 징수 등 호구의 조사파악을 위해 호적제도만 있었을 뿐이다.

조선조 호적은 실제 거주 중심으로 편제되어 동거노비의 경우는 동일 호적에 편제되고 별거하는 자녀는 별개의 호적을 편성하였다.

또한 호의 대표는 있었지만 호의 대표인 아버지가 사망하면 어머니가 그 뒤를 잇는 일이 조선 후기까지 일반적이었으며 조선 중기까지는 딸, 아들이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고 제사도 형제자매들이 나누어 지냈다.

오히려 우리 가족의 전통은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키웠던 것이다.

또한 성씨 문제도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외국에서는 아버지 성을 따르는 관습이 있지만 일본, 미국, 중국, 북유럽 국가 등에서는 부부 협의에 의해 자녀의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녀 출산은 부부 모두의 노력에 의한 것이고 여성의 부모로서의 권리를 인정한다면, 자녀의 성씨는 최소한 부모 협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강제조항은 풀어야 한다.

그리고 이혼 후 자녀를 데리고 재혼하는 여성의 경우 자녀의 호적, 성씨 등을 재혼한 남편의 것으로 변경할 수 없어 건강보험, 사보험 등에서 자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

가족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자녀의 성을 변경해야 하는 경우 자녀의 복리를 위해 성을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

호주제를 폐지하면 가족이 붕괴된다는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호주제는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한국의 가족을 수용하지 못하고 가부장제 가족관계를 강화시키고 있어 가족의 위기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호적을 검색하던 기준인이던 호주도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이 호적이 2003년부터 전산화되어 주민번호만으로도 충분히 호적 검색이 가능하기 때문에 호주가 없어진다고 해도 호적을 파악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평등하고 열린 가족제도로 전환하고, 호주제로 고통받는 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주제도를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정현백(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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