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64)이 북한관련 자료를 한국에 넘겼다는 혐의로 미국 당국에 의해 기소되자 한국 정부는 그를 외면했다.
'한국정부와 무관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홀로 버려진 듯했다. 그러나 조국의 사람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감옥에 갇힌 그를 면회했고, 어떤 이는 편지를 썼다. 어떤 이는 땀 흘려 번 돈을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조국을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보장된 미래를 잃어버린 한 사람을 위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로버트 김은 자신에게 배달된 수백 통의 편지에 빠짐없이 답장을 보냈다. 로버트 김과 후원회 사람들은 그렇게 인연을 키웠다. 그리고 지난 해 7월 '로버트 김 후원회'가 탄생했다.
로버트 김은 8년 가까운 수감생활을 끝내고 지난 달 말 석방됐다. '로버트 김 후원회' 회원들은 이제 조국의 외면을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그들을 만났다.
로버트 김 후원 회원은 2천명, 회원 등록을 않았지만 후원금을 내는 사람을 합치면 4천명에 이른다. 평범한 직장인, 기업인, 학생, 주부, 대학생 등 모두 각자의 일에 충실하면서 조금씩 정성과 시간을 덜어 로버트 김을 돕는다.
후원회 감사를 맡고 있는 박성현(사업)씨는 지난 99년부터 로버트 김을 돕고 있다. 박씨는 "로버트 김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동안 단 한번도 의연함과 인간애를 잃지 않은 로버트 김을 보며 오히려 자신이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후원회 이사를 맡은 백동일씨는 낯익은 이름이다. 백동일 대령이라면 기억을 더듬는데 도움이 될까. 로버트 김으로부터 북한관련 정보를 넘겨받은 장본인이다. 이 사건으로 백씨는 한직을 전전하다 예편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를 돕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했습니다." 백씨가 후원회 활동에 적극 나서는 이유다.
로버트 김이 가택연금에 들어간 지난 6월 두 사람은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다. 한 사람은 한국에서, 또 한사람은 미국에서. 두 사람은 지난 8년의 세월을 이야기했고, 아쉬움과 회한을 털어냈다.
유재건 의원(국회의원)은 사건 직후인 97년 3월에 결성된 구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로버트 김 사건은 외교적인 성격이 강했고, 국회의원들이 탄원서를 보내거나 미국 국무성, 검찰청을 방문해 활동을 펼쳤다. 그는 국회차원의 활동을 주도했고, 감옥에 갇힌 그를 면회하거나 가족을 만나 위로를 전했다.
20대 중반의 회사원인 임선영씨는 후원회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간사이다. 기성세대들은 흔히 젊은이들에게서 조국애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낯모르는 한 사람이 조국을 위해 일한 대가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 임선영씨를 만나면 젊은이에 대한 선입견은 무너진다.
임 간사는 "로버트 김을 통해 분단 현실,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지난 번 로버트 김의 출소 때는 그의 자택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로버트 김 후원회가 해온 일은 많다. 가장 큰 일은 사람들이 로버트 김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억을 들춰냈다는 점이다.
한국과 미국 정부에 탄원서를 내고, 신문기고와 기도회 등을 통해 로버트 김을 알렸다. 세월의 파괴력은 강철을 부수고도 남는다. 지난 8년 간 로버트 김이 부서지지 않고 우리 곁에 그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후원회의 활동 덕분이다.
로버트 김 후원회는 지난 달 20일부터 '로버트 김 돕기 ARS 모금캠페인(060-700-1996)'을 벌이고 있다. 개통 2주 만에 3만명이 접속, 약 6천만원의 성금이 모였다.
국내 후원자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스위스 등 해외교포들의 후원도 적지 않다. 조국을 사랑한 한 인간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이다.
ARS 전화가 개통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 개인을 위해 ARS 모금이 이뤄진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선영 간사는 "ARS개통을 위해 7개월 동안 후원회원들이 여기 저기에 수백 통의 전화를 냈고, 관계부처를 수십 번 방문했다"며 "한승주 주미대사가 ARS서비스를 허가하는 데 꼭 필요한 정부쪽 추천서를 써주는 등 많은 사람이 각 분야에서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후원회 측은 "이번 모금은 살 길이 막막한 로버트 김의 생활기반 마련을 위한 것인 만큼, 각자가 2천원짜리 벽돌 한 장씩 사서 로버트 김의 집을 지어준다는 마음으로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풀려나기는 했지만 스파이 혐의를 받았던 로버트 김은 연금을 받을 수 없고 금융거래마저 제한됐다.
로버트 김은 이렇게 말한다.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스파이들은 모두 혼자였습니다. 갇힌 그들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의 석방을 기다리는 가족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가족과 한국 국민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나를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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