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함께

입력 2004-08-03 09:00:24

한 달 가까이 잠겨져 있던

그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책상 위에는 펼쳐진 책이 한 권

원고지는 12매째 쓰다 말았고

담배 꽁초가 가득한 재떨이

빈 찻잔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화병의 꽃은 시들어 버렸고

보조 의자에 걸쳐놓은 코트는

구겨진 채 그대로 있었다

핏방울이 떨어진 흔적은 없었지만

공기는 고통스런 몸짓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어디로 갔나

김광규 '현장 검증'

수사반장을 보듯 남의 이야기로 읽으면 이 시는 싱겁다.

릴케가 아니라 하더라도 눈 뜬 사람이면 누구나 제 속에 또 한 사람의 타인을 데리고 산다.

제 속에 살고 있는 타인의 눈으로 현장을 검증해 보라. 이 방의 주인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쓰다 만 원고지,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 곰팡이 핀 찻잔, 구겨진 코트 등 고통의 몸짓을 환기하는 사물들은 그대 의식의 한 층위를 이루고 있는 세목(細目)들이다.

그 방은 얼마나 오랫동안 잠겨져 있는가?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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