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해외지사 근무로 영국에서 2년을 보내고 왔다는 한 초등학생 학부모를 만났다. 그의 얘기가 의미심장했
다. "처음 영국 초등학교에 가 보고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 애들은 덧셈, 뺄셈은 물론 어지간한 곱셈, 나눗셈까지 척척 해 내는데 영국 애들은 어렵지도 않은 걸 계산기로 하더군요. 우리나라 애들에 비하면 계산 능력이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들은 단순한 수학 문제 하나를가르치면서도 관련된 역사에서부터 배워야 할 필요성, 문제의 의미, 실생활과의 연관성 등 엄청나게 많은 내용들을 다루더라는 것. 결국 문제 풀이는 잘 못 해도 수학 자체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갖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자니 어린 시절 무턱대고 외웠던 구구단의 기억에서부터 2005학년도 대학입시에 이르기까지 갖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1, 2학년만 되면 구구단을 외운다.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고, 무엇때문에 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오늘은 4단, 내일은 5단, 외우기 숙제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꾸준히 초등학생 수학 실력 평가에서 세계 상위권을 유지해오고 있다. 수학을 지겨운 암기과목으로 전락시키고,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을 계산 기계로 만들고 수학에 절망하게 만들면서.
2005학년도 대학입시는 수학교육을 절망으로 이끄는 완결판이다. 수험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치르게 하는 취지야 그럴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힌다. 우선 인문계열 학생들 가운데 상위권 대학에 가지 못 할 학생이 면 아예 수학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논리학 공부를 위해 인문계열 학생에게도 수학 실력을 강조하는 프랑스 대학들이 보면 기절할 일이다.
자연계열 학생이라도 약간의 손해만 감수하면 수학Ⅱ와 미분.적분, 이산수학, 확률.통계 같은 과목 때문에 골치 아플 필요가 없다. 결과는 뻔하다. 수학 공부 제대로 한 학생들은 수학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의약계열로
진학하고, 수학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이 대거 이공계로 진학할 것이다. "미분.적분을 대학에서 다시 가르쳐야 할 정도로 신입생 수준이 낮다"고 푸념하던 대학들은 앞으로 아예 수학Ⅰ부터 커리큘럼에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압권은 역시 EBS 수능강의다. 이름 그대로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유명 학원 강사가TV로, 인터넷으로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법에 눈을 부릅떠야한다. 문제에 담긴 의미나 실생활 응용이 아니라 빠르게, 정확하게 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에게 계산기보다 빠른 계산 실력을 요구하면서 고교생들은 수학을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이공계 기피를 막고, 과학 강국이 되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미래는 불가능하다. 지금이라도 수학 시간 한 시간에 한 문제쯤 풀도록 하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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