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 대기자의 책과 세상-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입력 2004-07-16 09:03:45

장마도 주말을 넘기면 끝난다는데 맞을지 모르겠다.

전에는 이때 쯤 장마라면 응당 온 나라가 떠들썩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관계 공무원하고 방송에서만 그랬다.

목포에 퍼붓다 춘천에 퍼붓고 그러다 안동에 퍼붓고 오늘은 대전지방에 퍼부을 예정이라나. 그런데도 민심은 물난리가 예상보다 너무 경미하다는 듯 뒷전이고 다른 난리에 더 법석이다.

일테면 행정수도 이전문제나 이라크 파병, 혹은 청와대 홈피의 패러디나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총리의 그 당당하면서도 언짢아 해 하는 답변표정 같은 것 말이다.

장맛비는 하늘도 편가르기를 하는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국지성이다.

환경 탓이라지만 원인은 그런 것뿐일까. 하늘이 우리의 정치권을 읽고 마침내는 민심마저 읽은 것은 아닐까. 마치 너희들이 편가르면 나 또한 편을 가를 수밖에 없다는 투다.

편가르기.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갈라서기. 하늘은 그래서 이곳저곳에다 마구 물벼락을 내리고 있고 민심은 그래서 더욱 갈팡질팡이다.

청와대는 잽싸게 사과를 했지만 대통령이 직접 해야 한다고 또 야단이다.

인터넷으로 지난 대선 때 재미를 톡톡히 봤으면 됐지 무슨 영광을 다시 볼게 있다고 홈페이지에 그런 못된 재미를 골라 담았을까.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게 야단의 이유다.

총리양반은 한술 더 떠 네티즌이 올린 것을 청와대가 무슨 죄냐는 듯이 국회에서 따지는 한 여성 야당의원을 민망할 정도로 되레 다그친다.

말솜씨가 만만찮다.

말솜씨로 되는 일이 아닌 데도 말이다.

인터넷도 말솜씨도 모두 훌륭한 무기들이다.

좋은 무기를 가졌다.

그러나 무기의 무(武)라는 글자의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했다면 그렇게 마구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딱하다.

좌전에는 초나라 자작의 말을 인용하여 무(武)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止戈爲武(지과위무)'. 무기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무(武)'라는 글자의 의미라는 것. 다시 말하면 무(武)라는 글자는 과(戈)와 지(止)를 합한 글자로 싸움을 멈추게 하는 것이 본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싸움은 갈수록 더 치열해 지고 있다.

대통령은 또 현란한 무기인 그 말솜씨를 아끼지 않는다.

싸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며 말이다.

이러다간 온 나라가 싸움터가 되지 않을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일수록 올곧은 선비가 그립다.

절망의 시대를 건질 수 있는 선비는 다 어디로 갔는가.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실천의 사상가 남명(南冥) 조식(曺植)과의 만남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다.

경상대 허권수 교수의 역작.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늘 옷띠에 방울 성성자(性性子)를 차고 다녔다는 조선시대 대학자 남명의 생애와 사상, 학문을 연대순으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연대순으로 엮는 그 사이 지금은 많이 잊힌 우리의 전통문화, 예를 들면 과거 이야기 등을 아울러 재미있게 다뤄 우리것을 더 많이 알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 좋다.

오늘같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세태에 남명의 호쾌하고 대장부다운 삶은 읽는 모든 이들에게 흡족한 정신적 자양분을 전해주는 데는 그만이다.

남명사상의 핵은 뭐니 해도 경의(敬義). 성현의 천만가지 말을 요약하면 결국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남명에게 '경의' 두 글자는 그의 전부였다.

남명이 항상 지녔다는 주머니 칼에도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집 창문에도 이 두 글자를 써 붙여 두고는 "우리집에 경의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자주했다는 것. 남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덕천서원 현액도 '경의당(敬義堂)'이다.

벼슬길 마다하기로 유명했던 남명. 그러나 그의 서릿발같은 기질은 임금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갓 스물을 넘긴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 '단성소(丹城疎)'는 오늘에도 생각을 중요시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힌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 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 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고 있듯이 합니다…."

구구절절 오늘에도 충분히 경종을 울리고 귀감되는 말들이다.

이렇듯 남명은 지리산 자락에서 기개를 펼치며 아무런 구애 없이 후진을 양성하며 올곧은 선비의 자리를 지키며 일생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남명이 남긴 숱한 일화들과 높은 학문적 가치는 당시의 절망의 시대나 훗날 시시각각 닥친 숱한 절망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후광이다.

지금 그런 후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은 오늘 또다시 절망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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