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봄 식목일이었다.
외손주한테 끌려서 꽃집엘 갔다.
봉선화씨를 사다가 뒷마당에 묻었다.
학수고대하던 끝에 얼마만엔가 여나믄개의 싹이 나왔다.
그런데 그놈이 영 부실해서 안타까웠다.
주변의 나무들이 커서 음달이 된 것이였다.
보다못해 두 개의 화분에다 옮겨심고 햇볕을 보게하였다.
그랬더니 그 손가락만한 키에서 빠알간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 우리집 뒷꼍에서 보던 그와 똑같은 봉선화꽃이였다.
어느 무덥던 날 이틀간 집을 비웠다.
사흘만에 예의 봉선화를 보려 뒷마당으로 갔더니 작은 화분에 있는 놈들이 목이 말라 폭삭 시들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불쌍해서 물을 주고 하루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아! 이게 웬일인가. 꼿꼿이 원상태로 서있고 시들었던 꽃잎마저 다시 살아나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릴 때는 동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누볐다.
일제시대라서 물론 일본 노래였다.
해방이 되고서야 우리 동요를 배울 수가 있었다.
'울밑에선 봉선화'도 그 중 하나였다.
일본말은 몇해를 배웠어도 마냥 어렵기만 하였는데 한글은 일주일 배웠는데 좔좔 읽을 수가 있었다.
'푸른하늘 은하수', '울밑에선 봉선화' 우리말로 우리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글이 있고 우리 말이 있고 우리 노래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최근에 알게된 일이지만 봉선화 노래는 우리 근대가곡 제 1호에 해당한다.
홍난파 선생은 최초로 일본에 건너가 서양음악을 공부한 분이다.
그가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어린이들이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든 것이라한다.
그 첫 번째 것이 '울밑에선 봉선화'라는 말이었다.
어린이들이 노래를 불러야한다.
그런데 그네들이 부를 노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문인 친구들에게 노랫말을 부탁해서 어린이노래 만들기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1921년의 일이라 하였다.
그 뒤 '반달', '나의 살던 고향'등 수많은 곡들이 만들어졌다.
'울밑에선 봉선화'는 우리아이들에게 노래를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홍난파선생의 애국애족의 간절한 마음 씀에서 생겨난 생명의 나무와 같은 것이었다.
그 생명의 나무는 점점 자라서 온 나라에 번져 나갔는데 나라잃은 설움에 편승하여 망국가처럼 퍼져나갔다한다.
마침내 일본사람들은 봉선화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성악가 김천애 선생은 만주땅 조선족들을 찾아다니며 목이 터져라 봉선화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를 등진 이국땅 동포들이 봉선화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부둥켜 울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월은 흘렀어도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어쩐 일인지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배우지를 않는 것인지, 아니면 부를 마땅한 노래가 없어서인지, 노래할 여유가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6·25전쟁 중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유행가와 동요와 서양노래까지 합해서 노래가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고 할만 하였다.
젓가락 숟가락을 하도 두들겨서 술집 나무식탁이 모두 성한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것 밖에는 또 다른 낙이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해서 그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
우리나라 큰 작곡가들이 어린이가 부를 노래를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큰 시인들이 노랫말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밭매면서 논매면서 옛날 어른들은 노래를 불렀다.
지겟다리 두들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베틀에 앉아서, 애기를 업고서 우리네 할머니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살림 속에서 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
골목에서 집안에서 어린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나라. 아름다운 노래는 대 예술가들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름다운 노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최종태 조각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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