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비 오는 날의 서정

입력 2004-06-26 11:25:13

미치도록 파란 하늘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삭여 주듯 먹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립니다.

우리의 축처진 지친 어깨위로 술렁이는 도시의 거리로 비가 내립니다.

비는 장대같이 내리 퍼붓습니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것이 꽹과리 소리처럼 귀가 따갑게 들려옵니다.

저 멀리서 산울림처럼 가슴속 한가운데를 징 울려놓고 나옵니다.

여운이란 이런 것일까요? 여태까지 베일에 쌓이고 쌓인 찌꺼기들이 싹 쓸려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쓸려나가고 반복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뭔가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지 않을까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내 귀를 간질이고 사라집니다.

나는 창문을 열어제치고 들어오는 비를 맞습니다.

두 팔을 벌려 맞습니다.

빗줄기들이 튀어서 얼굴에 와 닿습니다.

유치원 다니는 개구쟁이들이 장난을 치는 것 같습니다.

무수한 잎사귀를 단 나뭇가지를 때리고 흘러내립니다.

창문에 부딪고 흘러내리는 빗방울 속에 내 꿈이 흘러갑니다.

주르륵, 주르륵 새 울음소리 같습니다.

아니, 먼 이국 땅에서 애원하며 못내 안타까워 부르짖는 소리 같습니다.

햇볕과 바람에 의해 익어 가는 포도송이도 비를 맞으며 흔들리고 있습니다.

유년 시절, 비가 오는 것이 좋아 동네 개구쟁이들과 종이배를 만들어 개천가로 몰려갔습니다.

손에는 다 떨어지고 찢어진 비닐우산에서 국산품이 아닌 외제 우산까지 들고 모여들었습니다.

다 떨어져 헤어진 고무신을 무명실로 기워 신은 아이들에서 좋은 새 장화를 사 신은 아이들까지 이날만은 모두모두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며 비 오는 날의 뱃놀이를 즐겼습니다.

누구배가 빨리 갈까 하고 조그만 심장에 고동을 느끼면서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습니다.

온 몸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재생되듯 뇌리를 스쳐갑니다.

이제는 흘러가 버린 추억일 따름입니다.

비 오는 날 막차를 타고 어둠이 몰려든 차창가로 눈을 돌리면 형용할 수 없는 서글픔이 맴돕니다.

야릇한 기분,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곧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큼 껄껄한 소리에 놀라서 차안을 휘둘러보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비에 젖은 도시의 밤은 항상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주점은 점점 고조되어가고 뮤직박스에는 취한 취객들을 위해 좀 더 쨍쨍 울리는 음악을 들려줍니다.

술에서 인생을 찾고 술로서 세상을 논하는 것 같습니다.

젖고, 젖고, 젖고 그러면서도 미진한 듯 일어설 줄을 모릅니다.

한 덩어리의 풀려지지 않는 고독이 남아 있습니다.

인생의 한 과정으로 여겨버리는 사람들. 한 줄기의 빛이 강타합니다.

번쩍 정신이 들고 꽃의 아버지를 찾고 뻗쳐오르는 미진한 혼을 의식합니다.

슬픔이 승화된 긴긴 고행을 견디면서 한 마리의 작은 새를 봅니다.

까맣게 속 타들어 가면서 죽어 가는 새를 봅니다.

깊은 곳에서 울음을 웁니다.

소리도 없이 흐느끼는 곳에 가볍게 날아드는 음률. 곧이어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죄를 의식하고 그 밑바닥에는 생성의 아픔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의식합니다.

탄탄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 주인공을 찾습니다.

가슴은 죽어 있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습니다.

바람은 빗속을 가늘게 흔들며 머리칼을 가만히 흩날리며 생을 흔들고 있습니다.

무엇일까, 무엇을 해야 할까? 조용할 뿐인데도 이렇게 가슴속을 저며 오는 것은 오직 하나. 그래, 하나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뿐만 아니라 둘 셋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 그 여유를 가지고 싶습니다.

미친 망둥이처럼 뛰고 뛸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활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금도 미루지 말고 추구해 나가야겠지요.

패인 아스팔트 빗물 위에 조그만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슬프디 슬픈 솔베이지 노래의 애잔한 멜로디가 가슴속에 스며듭니다.

이런 날이면 조롱에 갇힌 새처럼 구속된 이곳에서 도시의 소음을 회피하여 강변을 조용히 거닐어 보고 싶습니다.

비에 젖은 채로 마냥 서성이고 싶습니다.

멀리서 기적이 웁니다.

현실이 웁니다.

홍승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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