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위기를 통해 발전한다.
고유가, 원자재난 등 최근의 국내외 경제 환경은 지역 중소기업들이 감당하기 힘든 대(大) 위기임에 틀림없지만 지역 산업구조를 고부가 중심으로 재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대구 경제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성서공단에선 이미 산업구조의 가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1980, 90년대부터 기술개발 없이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경쟁적 증설에만 몰두했 왔던 전통 섬유산업이 급속히 붕괴되고 있는데 반해 R&D 비중을 늘리고 있는 자동차부품, 기계.금속, 전자부품업체 등이 빠르게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이런 기업이 산다-향후 10년을 내다보는 R&D투자
대지 1만9천586평. 단일 공장으로는 성서공단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갑을합섬 부지는 이제 더 이상 섬유 생산기지가 아니다.
중국산 저가공세와 공급과잉에 원료값 급등까지 겹치면서 기업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 온 갑을합섬은 최근 1만 3천여평의 공장부지를 자동차부품업체와 전자부품업체에 분할 매각했다.
이제 갑을합섬에 남은 순수 섬유 분야는 1천평 내외에 불과하다.
3천여평 규모의 갑을합섬 원단창고는 이달 초 (주)경창산업의 레저자동차용 변속기 생산공장으로 탈바꿈했다.
그 오른쪽으로는 1천100평 규모의 경창산업 프레스공장 설립이 한창이고 이달 안으로 (주)액트의 5천평 전자부품공장도 속속 입주할 예정.
변속기 생산 현장에 발을 딛자마자 갓 들여온 최신식 설비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변속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글로빙기와 3차원 가공기는 대당 가격만 수십억원에 이르는 고부가 제품으로 이같은 첨단 장비를 도입한 국내 중소업체는 경창산업이 유일하다.
이곳에서 만드는 신개념 변속기는 깎아내는 기존의 절삭기법 대신 롤을 굴려 포밍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비점진 성형공법'이라 불리는 롤 포밍 기술은 오차범위를 획기적으로 줄여 변속기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 기술 전개가 까다로워 제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 왔던 첨단 공법으로 경창산업이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했다.
차달준 담당 이사는 "신규 공장 설립을 통해 변속기 생산량은 86만대에서 130만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차세대 변속기에 600억원의 R&D 자금을 투자한 경창산업은 글로벌 자동차부품업체로의 진입을 꿈꾸며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신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기업이 죽는다-한 아이템만 10년 생산
기술개발 없이 지난 10년간 한 아이템만 고집해 온 2차단지내 모 직물업체. 한때 성서공단내 수위를 다퉜던 유명 수출업체였지만 위험부담이 큰 R&D 투자와는 담을 쌓고 지내다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중국산 제품에 경쟁력을 잃고 지난 4월 100여대의 직기 및 부대설비 가동을 완전 중단한 이곳은 공장을 매각한다는 커다란 팜플렛이 처량함을 더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중국의 추격이 아무리 무섭다고 하지만 섬유업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며 "잘 나갈 때 R&D에 집중 투자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생산설비 또한 전혀 변화가 없었다.
구입 당시만 해도 5천만원을 호가했던 최고급 제직기였지만 10년이 지난 현재는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상태. 국내에서는 거래 자체가 끊겨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만 겨우 수출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
인근 ㄱ화섬 성서 1, 2공장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 90년대 초 중국의 무서운 성장세를 예상하지 못하고 일반 폴리에스테르 원사생산 및 제직에만 주력하다 지난 3월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조명이 모두 꺼진 어두컴컴한 생산현장엔 뿌연 먼지만 쌓인 50여대의 직기가 아직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서공단관리사무소 한 관계자는 "R&D 투자를 아끼지 않은 소수 섬유기업들은 사상 최악의 대불황속에서도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한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섬유업체가 상당수"라며 "기술개발을 등한시하는 업체는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사진: 갑을합섬 원단창고에 들어선 경창산업 변속기 생산 현장. 600억원을 차세대 변속기 개발에 투자한 경창산업은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신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김정숙 소환 왜 안 했나" 묻자... 경찰의 답은
"악수도 안 하겠다"던 정청래, 국힘 전대에 '축하난' 눈길
李대통령 지지율 2주 만에 8%p 하락…'특별사면' 부정평가 54%
국회 법사위원장 6선 추미애 선출…"사법개혁 완수"
한문희 코레일 사장, 청도 열차사고 책임지고 사의 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