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한 산골 아낙이 억척스럽게 농사지어 돈을 모았다.
이웃들이 그걸 알고는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라며 성화다.
만약 당첨된다면 돈방석에 앉는다고 치켜세웠다.
솔깃해서 청약하기에 이른다.
돈방석에 앉는 꿈을 꾸며 말이다.
그런데 산골에서 아무리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해도 어디 청약금이 그렇게 만만한가. 대출을 신청했다.
용도란에 무엇이라고 썼을까. 한마디다.
"쪼채서".
우스갯소리다.
'쪼친다'는 말은 쫓기다의 사투리. 주로 서민들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돈이 없으면 이런 표현으로 잘 대신한다.
경상도 억양이 자연스레 가미되면 의미도 실감난다.
무엇인가에 뒷덜미를 잡히는 듯한 어감까지 리얼해서 더욱 친밀감이 가는 단어다.
그러나 그 내용만은 결코 친밀할 수가 없다.
쪼치는게 좋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요즘 쪼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서민들이랄 수도 없는 이들이 쪼치다니. 어디가 그렇게 쪼칠까. 쪼칠때는 말도 많은 법. 오가는 말들이 거칠고 험악하다.
부질없는 힘까지 구차스럽게 붙어있어 추하기까지 하다.
그런 말들의 진원지는 모두 우리의 앞날이 걸린 곳들이어서 더욱 분하다.
어깨 쫙 펴고 주야로 서민들 생각하며 잠잘 시간도 아까워 해야할 지도층들. 저들끼리 으르고 사과하고 비아냥거리며 조잡한 말들이나 주고받다니. 일부러 사회를 불안에 빠뜨리려는 아주 고등 수단 같은 의구심도 든다.
마치 떠돌이들의 합창공연을 보는 기분이다.
그 합창 소리에 서민들만 불쌍하고 불안하다.
소리라고 어디 다 소리인가.
이런 시절에는 차라리 중국의 고대 기서로 불리는 '산해경(山海經)'를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이 산과 바다를 이룬다.
넘치는 상상력. 기이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들이 뭐 이런 것도 있나하고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여겨지지만 읽을수록 야 이런 것도 있구나로 바뀐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요즘의 우리들처럼 결코 쪼치는 구석없이 마음껏 나름대로 배짱 좋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불린다.
BC 2679년 황제때부터 BC 2224년 하나라 우임금 때까지 455년간에 씌어졌다.
모두 32권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진나라 곽박(郭璞)이 18권으로 줄여 주석을 붙이고 재정리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내에도 몇 가지 번역서들이 나와 있고 심지어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산해경'도 있다.
사마천도 괴상한 사서라서 감히 손을 댈 수 없다고 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본문을 한 번 보자. " 어떤 새는 생김새가 올빼미 같은데 사람과 같은 손을 갖고 있고 그 소리는 암메추리의 울음과도 같다.
이름을 주라고 하는데 제 이름을 스스로 불러 대며 이것이 나타나면 그 고을에 귀양가는 선비가 많아진다…서북쪽에 어떤 짐승이 있는데 사람의 말을 알아들어서 그 싸우는 소리를 듣고 정직한 자를 잡아먹는다.
누군가 성실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 코를 베어먹고 약하고 그릇되다는 소리를 들으면 짐승을 갖다 바친다…".
이야기 전개는 모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어찌 수천년 전의 이야기가 흡사 오늘의 우리들 시정 이야기에 빗대어도 이렇게 아귀가 딱 들어맞을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무언가 깊은 의미마저 주는 것 같다.
제 이름을 스스로 불러대는 새. 오늘날 이런 새들이 세상을 훨훨 날고 있다.
젖 달라, 아니다 되받아 치며 비아냥거리듯 날고 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귀양가는 선비들의 신세. 이런 상상도 가능할까.
싸우는 소리를 듣고 정직한 자를 잡아먹는 짐승. 왜 정직한 자를 잡아먹는가. 공부나 하라고 삿대질이나 퍼붓고 목을 치겠다고 하자 품위와 불안을 내걸며 으름장이다.
정말 막 하자는 식이다.
이런 만신창이 세태에는 솔직히 성실한 사람들만 코를 베이기 마련이다.
'산해경' 말이 딱 맞다.
아무튼 책을 읽으면 이런 상상들이 내내 가슴과 마음을 진동시켜 야릇한 동류의식마저 일으키게 한다.
감개무량한 동류의식 말이다.
일찍이 숱한 시인 묵객들은 이 책에서 상상력의 실마리를 찾곤 했다.
지금도 그런 시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의 동식물을 해학적이고 비유적으로 기록했지만 이는 고대부족의 삶이 그랬었다는 것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화적인 요소에서 더욱 값진 세계를 맞을 수가 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책이 중국뿐 아니라 동이(東夷)계동, 특히 우리나라와 동북아권의 민속이나 종교 등 기층문화 전반을 이해하는데 소중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궁화나 조선이라는 말도 그 어원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
그런 것도 좋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산해경'에 나오는 풍부한 상상력은 모두 인간과의 관계라는 점이다.
뿔이 달리고 외눈에 뱀꼬리가 붙었어도 결국은 이것을 또는 이것이 어떻게 하면 사람이 어떻게 되거나 관계 지어지는 것이다.
관계? 중요하지 않은가. 사람사는 동네에 관계는 늘 있다.
그 관계가 좋으면 모두 열심히 산다.
그러나 그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들은 모두 쪼치기 마련이다.
쪼치면 무릇 선비가 귀양가는 꼴이거나 코가 베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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