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입력 2004-06-18 09:33:52

1392년 이성계가 왕좌에 올라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8도 도통사 최영과 우왕, 창왕을 제거했을 때 이미 예견됐다.

그의 조선건국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선비들 사이에서는 요즘 설전이 대단하다.

학자들 중에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던 최영 장군과 '이 몸이 죽고 죽을 때까지 고려왕조에 충성하겠다'는 정몽주를 죽인 점을 보더라도 이성계는 잔혹한 쿠데타 세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문적으로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지칭한다.

쿠데타는 지배자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며, 혁명과 달리 민중의 지지가 없다.

쿠데타는 또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파의 체포.탄압, 정부요인의 납치.암살, 군사적 강압 등을 배경으로 한다.

또 언로를 장악하고 대국민 선전에 나선다.

이렇게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은 명백히 쿠데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성계의 건국 과정이 아니라 그의 집권이 대다수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건국과정의 불법과 폭력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지배층간의 권력투쟁만 살피는 오류에 빠진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오직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을 뿐인가, 대다수 국민의 삶을 이전보다 나아지게 했는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조선을 건국할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왜구가 날뛰었고 바닷가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비옥한 땅과 소금 생산, 목축에 유용한 토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조세수입은 줄었고 해로를 통한 운송은 불가능했다.

해안의 조세 창고는 모두 내륙으로 이동했다.

왜구가 날뛰고 있었지만 고려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권문세족의 토지 장악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은 도를 넘었고 국가 재정은 극도로 취약해졌다.

세금을 낼 수 없는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전에는 베 한 필로 쌀 10되를 살 수 있었으나 우왕 5년엔 쌀 3,4되 밖에 구할 수 없게 됐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도 비현실적이었다.

철령 이북을 자기 땅으로 삼겠다는 명나라의 선언이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제 몸 하나 지탱하기 힘든 고려가 정벌전쟁에 나서는 것은 무리였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우리 땅을 지키겠다는 기개는 훌륭하지만 어디까지나 기개에 불과했다.

왜구의 약탈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약소국이 '중원의 뜨는 별'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이성계는 권력을 장악한 후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권문세족의 농장을 해체하고 신진사대부에게 고루 토지를 나눠줬다.

문란한 조세제도를 고쳐 농민생활을 안정시켰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지방을 8도로 개편하고 고려 때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역까지 수령을 파견했다.

중앙에서 직접 전국 구석구석을 살피겠다는 의지였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명백히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의 쿠데타가 다수 백성에겐 유익한 면이 컸다.

이성계가 가장 크게 비판을 받는 부분은 새 왕조 건설이다.

굳이 기존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있는 한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국가와 국민은 왕과 왕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정부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고려 왕조가 유지돼야 할 이유는 없다.

정도전은 '임금은 하늘이 만들어 준다'고 했다.

민심이 떠나면 왕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분명히 고려를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의 변명이다.

그러나 '민심은 언제든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진리다.

이 진리는 고려뿐만 아니라 어느 왕조에나 똑같이 적용된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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