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두의 골프콩트-"그린은 침대다"

입력 2004-06-17 09:35:11

몇해 전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전파를 탄 적이 있다.

세 살배기라도 이 문구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술 더 뜨는 골퍼가 있다.

이 골퍼는 침대가 과학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린이 침대라고까지 생각한다.

"우리 앞 조, 침대에서 기는 것 좀 보라구".

나는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앞조의 더딘 진행에 짜증을 내는 줄 알았다.

"큰 내기를 하나 보죠. 1만원짜리라고 해도 한타 놓치면 3만원을 잃으니 전후, 좌우에서 신중하게 그린의 기울기를 읽는 것이겠죠".

"침대는 과학이야. 천이 거칠면 힘을 더 줘서 세게 밀어줘야 하고, 젖었을 때보다 말랐을 때가 더 잘 미끌어지고…. 과학적으로 답이 나오잖아. 멍청하게 침대에서 기기만 한다고 구멍이 공을 빨아들이나".

그린을 침대라고 여기는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66타이고, 자신이 주장하는 핸디캡은 3이다.

이글은 40번이나 해봤지만 아직까지 홀인원의 기록은 없다고 했다.

그린이 티잉그라운드보다 10m는 높은 곳에 있는 파3홀에서였다.

그의 공이 깃대를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갔다.

동반자 모두가 깃대와 공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깃대를 맞추고 컵 안으로 들어갔는지 다른 방향으로 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에 홀인원이면?"

내가 물었다.

"그린에 올라가서 발가벗고 춤을 추지…".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혼란에 빠졌다.

정말 홀인원이면 그가 발가벗고 춤을 출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아무리 벗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린 위에서는 옷을 벗을 수 없다.

만약에 옷을 벗는다면 당장에 퇴장을 당하고 앞으로 입장하는 데도 제재를 받을 것이다.

그가 그린을 침대로 여기는 것이 빈말이 아닌 듯했다.

그는 그린은 구멍을 노리고 기어 다니는 곳, 발가벗고 춤을 추어도 되는 곳으로 굳게 믿는 얼굴이었다.

그의 그런 표정을 읽자 불현듯 내 글의 애독자이자 펜팔 친구였던 이가 보냈던 편지구절이 떠올랐다.

-제 꿈은요, 불가능하겠지만 비 오는 날 그린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절 이상하게 보지는 말아주세요. 그냥 꿈이니까요-

나는 보드라운 풀이 융단처럼 깔린 그린을 바라보며 펜팔 친구의 꿈을 그려본다.

자연 그대로의 침대에서, 자연 그대로의 사랑을 나눠보고 싶은 꿈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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