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50.에필로그)어둠을 뚫고 나온'여명의 역사'

입력 2004-06-14 09:07:04

어둠을 뚫고 나온 '여명의 역사'

바람이 살랑댔다.

대숲이 흔들렸다.

가늘고 파란 댓 잎들이 소리에 취해 쓰러졌다.

다시 일어섰다.

정정골(琴谷) 깊은 계곡에 우륵(于勒)이 현(絃)을 뜯고 있었다.

소리는 바람을 타고 흘렀다.

계곡 물소리도 금(琴)의 소리에 묻혔다.

소리는 계곡에 부딪혔고, 메아리는 제자 이문(泥文)의 귀를 때렸다.

환희의 소린지, 아픔의 소린지 헛갈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대가야(大加耶) 지방을 아우르던 소리는 신라(新羅)의 땅으로 울려 퍼졌다.

주인이 바뀐 땅에서 대가야의 우륵과 신라의 우륵이 아름답고도 구슬픈 음률을 토해냈다.

정정한 소리였다.

가야금(加耶琴). 그 노래는 역사의 노래였다.

천 수백 년을 훌쩍 넘나들었다.

웅비의 노래였고, 한(恨)의 노래였다.

월광사(月光寺)의 월광태자도 망국의 한을 달래며 금의 노래를 곱씹었을 터. 그 노래는 지금도 절 터 앞을 가로지르는 야천(耶川)에 실려 흐르고 있다.

그렇게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아! 대가야.

칼이 춤추고 있었다.

기문(己汶)과 대사(帶沙), 그리고 관산성(管山城)에서. 칼의 고향은 야로(冶爐)였다.

칼은 고향을 떠나 백두대간을 넘고, 강물을 건넜다.

분홍빛 진달래를 더욱 붉게 만든 칼이었고, 피였다.

왜(倭)를 겨누고, 신라와 백제(百濟)를 겨눈 검(劍)이었다.

시퍼런 쇠였고, 핏빛 검이었다.

고령읍내 대장간의 쇠도 같은 쇠였다.

대장장이의 팔뚝을 불끈 솟게 만든 쇠는 1천500년 전 바로 그 쇠였다.

쇠는 칼로, 창으로, 투구로 바뀌어 적을 내리치고 막았다.

피를 튀겼다.

피는 살을 녹이고, 꽃망울을 물들였다.

그리고 황강과 남강, 섬진강을 적셨다.

그 피는 드넓은 땅으로 돌아왔다.

땅은 피와 죽음의 대가였다.

역사는 칼의 역사였고, 피를 마시며 흘렀다.

피를 적신 땅은 다시 신라로 돌아갔다.

역사의 피를 머금은 칼은 지금도 고령 대장간에서 춤추고 있다.

아! 대가야.

여인의 몸이 흙이 되어 윤기를 더했다.

도톰한 젖꼭지와 가냘픈 허리, 부푼 엉덩이였다.

젖꼭지와 허리와 엉덩이는 뚜껑과 잘록한 항아리 몸통이 되었다.

목에는 물결무늬(波狀紋)가 더해졌다.

그릇받침(器臺)에는 뱀의 눈을 보탰다.

흙이 파이고, 불길이 타오르고, 장인의 손이 닳았다.

흙을 빚는 장인의 혼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토기는 태어났다.

목이 길거나 짧은 항아리(壺), 원통모양(筒形)과 바리모양(鉢形) 그릇받침이 빛을 발했다.

묻힌 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항아리와 그릇받침이었다.

서로, 남으로 수백 리를 달린 토기였다.

토기는 고을마다 뿌려졌다.

그 토기는 문화였고, 세력권이었다.

대가야 토기의 모태, 고령 내곡동 토기요지에는 지금도 천 수백년 전의 흔적이 나뒹굴고 있다.

토기는 다시 고려청자로, 조선 분청사기로, 백자로 거듭났다.

흙의 신비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아! 대가야.

금(琴)과 검(劍), 흙의 노래. 그 선율은 강과 바다물결, 태양 빛을 타고 천 수백 년을 울리고 있다.

금과 검, 흙이 빛을 발할 때 대가야의 태양도 더 강렬하고, 드넓은 태양이었다.

그 때의 해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대가야 도읍의 관문, 금산(錦山)재 너머에서 살포시 해가 솟았다.

새벽 찬 공기에 햇살을 뿜어냈다.

천년 세월의 피와 대지의 기(氣)를 빨아들인 탓인지 해는 더 붉었다.

옛 도읍을 감싼 지산동 고분이 그 빛을 받아 자태를 드러냈다.

붉고 푸른 원색의 물결이 무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덤 속 왕들이 걸어나와 새아침을 노래할 듯했다.

일출의 기운을 머금은 대가야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찬란한 역사의 궤적을 더듬듯 다시 살아오고 있었다.

1천700년 전, 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신 이비가(夷毗訶)를 감응시킨 가야산도 멀리서 고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산, 가야산은 대가야 후손들이 세운 해인사를 품에 안고, 옛 왕들의 무덤을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

가야산과 지산동 고분 사이에는 또 철의 고향인 야로와 월광태자의 안식처인 월광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다가올 역사를 기다리면서.

가야산 꼭대기에서 뻗은 가천(加川)과 야천(耶川)은 오늘도 옛 도읍을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두 물줄기는 도읍지에서 만나 회천(會川)이 되고,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 물줄기는 역사의 물줄기였다.

가천과 야천, 회천의 젖줄을 머금은 대가야 땅은 그렇게 내일을, 역사의 복원을 바라고 있을 터.

'아! 대가야' 시리즈(2003년 7월7일~2004년 6월21일)를 매조지 할 시점이다.

1년 동안의 대장정이었다.

흙 속의 가야금과 철, 토기의 왕국 '대가야'를 조금이나마 벗겨낸 것으로 자위한다.

그러나 '수수께끼' '베일 속' '비밀의 왕국' 등 숱한 수식어를 단 대가야는 여전히 묻혀 있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더 많은 빛이 필요하다.

규명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이 남았다.

역사를 올곧게 세워야 할 후손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금과 검, 흙의 노래가 귀청이 시리도록 울린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사진: '아!대가야' 취재팀. 왼쪽부터 안상호.김인탁.임광규(편집).김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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