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 대기자의 책과 세상-행복한 책읽기

입력 2004-06-12 08:56:12

다리를 다친 후 한의사 친구의 권유로 그에게 비정기적으로 침을 맞는다.

침을 맞을 때마다 엄살을 떨지만 친구는 늘 태연하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왜 표정조차 없느냐고 물었다.

침을 놓을 때는 정신을 집중하고 정신을 집중하면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행복하면 그 행복에 겨워 표정이 없게되는가 보다며 그제야 빙긋이 웃는다.

침술을 끝내고 침통에 침을 넣으면서 말이다.

침을 맞고 나면 아픈 다리가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그런데 가볍게 느껴질수록 이상한 것은 한의사 친구의 행복이 마치 나의 행복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행복? 그게 뭘까. 남의 아픔에 행복하다니. 이런 편견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럴수록 한의사 친구의 행복에 대한 신뢰는 깊어만 간다.

참 이상한 노릇이 아닌가. 남의 행복에 신뢰를 줄 수 있다는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만큼 그 친구는 그 자신에게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러웠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렇게 믿음과 확신에 차 있는 자신을 온전히 지니고 있을 때 비롯되는 것일까.

행복은 자족 속에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한의사 친구는 분명 자족하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소재로 한 작품 '악마의 사전'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비어스도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는 데에서 생기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한의사 친구는 분명 많은 환자의 행복을 바라볼 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지배하고 불행은 극복하라는 독일 속담처럼 그 친구는 행복을 지배하고 있었다.

김현. 불문학자요 문학평론가. 지난 90년 48세로 작고했다.

그의 '행복한 책 읽기'란 책이 있다.

유고일기를 원문대로 삭제 없이 출판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앞서 4년간(1986~1989)의 일기였다.

그냥 일기가 아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읽어 내려간 독서기록을 독특한 글쓰기로 기록해 놓았다.

생의 전부를 책과 사랑한 흔적이 구절마다 흥건하다.

이런 책읽기와 글 쓰기. 생경하면서도 가슴으로 끌어당기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 즐거움. 그것이 그에게는 삶이었다.

중심줄기를 이루는 독서기록들 사이사이에 김현은 사회문제, 병, 여행, 등산, 인간 관계 외에도 영화에 대한 단상들을 그 특유의 촌철살인 같은 짤막하고 직관적인 인상기들이 단단하게 끼워져 맞물려 있다.

책머리에 해제를 쓴 이인성은 이렇게 말하면서 "이러한 형식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독자적인 형식일 수 있다"며 짧은 몇 마디 말 속에 큰 핵심을 실어 나르는 단장 형태의 글이 짧고 맛있다고 적고 있다.

1987.3.10.

프로이트의 예술론 속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그러나 때로는 너무나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성찰이 담겨있다.

프로이트를 되풀이 해 읽으면, 인간은 불행하게 살아가게 운명지어진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리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여기가 역설이다-결정해 버린 사람의 비극!

1987.3.15.

청계산은 부드러우나 거친 맛이 없고, 관악산은 거칠지만 부드러운 맛이 없다.

그 둘을 다 갖춘 산은 북한산이다.

그래서 북한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옛 날에 쓴 시 한 구절:

저 붉은 해 속에도 산은 있으리/ 산이 있으니 모르는 사람도 있으리

1988.3.29.

기형도의 '죽은 구름' '추억에 대한 경멸'은 읽을 만하다.

그의 시의 특색은 바흐친이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이라고 부른 수법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서 일상적 행복과 절연된 채, 구름처럼, 혹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나이든 사내의 지친 모습을 냉정하게, 사진 설명하듯 묘사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그로테스크하다….

위의 글은 책 속의 몇 날의 일기를 인용해 본 것이다.

김현은 이렇게 일기를 썼고 지금 우리는 다시 그 김현을 읽는다.

작가의 실명이 등장하면서 그 작가의 작품을 신랄하게 쏘아붙이는가 하면 가차없이 밀어붙이기도 하지만 이 모두 그가 세상 속을 응시하며 사유의 궤적들을 녹슬지 않고 끝까지 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 온갖 행복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김현은 갖은 죽음의 징후들을 느끼면서도 책을 통한 유쾌한 삶에의 열정을 드러냈다.

지금 가무를 즐기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청껏 부르면 행복할까. 쓰레기로 만든 만두가 아이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거나 말거나 빈곤층이 채석강의 돌처럼 켜켜이 쌓이거나 말거나 미군이 보따리를 싸거나 말거나 우리들의 행복한 축배는 계속되어야 할까. 누군가 '행복한 운동권 읽기'라도 한 권 써야 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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