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대가야-(49)풀어야 할 숙제

입력 2004-06-07 09:00:34

무덤 속 역사였다.

기록이 거의 없는 잊혀질 뻔한 역사였다.

1천500년 이상 잠든 역사였다.

그런 가야(伽倻)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나고 있다.

가야의 역사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린 수수께끼였다.

가야사(史)를 독립적으로 다룬 문헌은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한과 삼국, 일본, 중국 역사서의 일부에만 다뤄졌을 뿐이다.

이 중 가야 관련 내용이 양적으로 가장 풍부한 사서는 '일본서기'(720년 펴냄)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역사는 왜곡과 덧칠로 얼룩져 있다.

1900년대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가야사를 풀이했다.

식민사관을 바탕에 깐 굴절된 시각이었다.

가야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왜(倭)의 지배를 받았다는 '임나일본부설'도 여기서 나왔다.

일제는 이 식민사관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반도 땅을 샅샅이 파헤쳤으나 결국 '허구의 뿌리'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가야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영원히 가려질 뻔한 가야의 베일을 조금씩 벗겨냈다.

'광개토왕릉비'(414년, 장수왕)는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과 임나가라의 대응을, '삼국사기'(1145년, 김부식)는 가야제국의 전쟁과 멸망상황을 다뤘다.

'삼국유사'(고려 충렬왕, 일연)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와 5가야의 형체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이행 등)은 대가야 건국신화를 어렴풋이나마 전했다.

또 중국 '삼국지'(삼국시대, 진수) '남제서'(양〈梁〉, 소자현) 등에 관한 연구는 대가야와 남제의 사신교류, 가야의 대외관계 등을 밝혀냈다.

1977년과 78년, 고령 지산동 44호 및 45호 고분의 발굴은 그야말로 무덤 속 가야가 빛을 보게 되는 획기적 계기가 됐다.

이후 합천 옥전 고분군을 비롯해 거창 함양 남원 장수 진안 의령 진주 산청 등지 대형 무덤의 발굴은 가야, 특히 대가야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신라나 백제에 견줄 만한 왕(족)의 무덤과 그 속에서 나온 왕관과 토기, 철의 왕국을 대표하는 갑옷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창 방패, 돌에 새긴 비문 등이 쏟아진 것이다.

한반도 역사책의 한 페이지조차 장식할 수 없었던 가야, 특히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역사는 결코 승리한 자만의 역사는 아닐 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만의 역사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사국의 역사'를 주창하는 학자들도 있다.

일부는 대가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갔다고 보고 있다.

최근 북한 학자들도 가야사의 체계화를 시도하고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 조희성 역사연구소 실장은 지난 2001년 낸 '가야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펴냄) 서문에서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후부여와 함께 한반도 첫 봉건국가의 하나로서, 철 생산과 금, 은 가공술이 발전했다"고 했다.

조 실장은 또 "가야는 중앙집권을 지향하면서도 분권적 소국연합체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 발해 역사와 함께 한반도 역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가야사'는 가야국의 성립과 정치제도, 영역, 종말, 문화 등을 전편에 싣고, 가야인의 일본열도 진출과 정착, 왜(倭)에 형성된 가야계통 소국, '일본서기'에 나타난 임나일본부의 정체 등을 후편에 담았다.

가야제국이 비록 하나의 고대국가로 통합.발전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엄연히 역사적 실체로 존재했던 만큼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대가야 금관국 안라국 다라국 졸마국 산반하국 사이기국 탁순국 고차국 기문국 등 가야제국의 흔적들. 중국과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 백제 신라와 직접 전쟁을 벌이거나 군사를 파견한 사실이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또 경남 서남부와 호남 동부 일대에는 대가야 유물이 산재해 있다.

400년대 후반 이후 대가야는 가야제국 영토 상당 부분을 직접 또는 간접 지배하면서 강력한 영향을 미친 세력임이 고고 자료에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세토나이카이를 중심으로 한 일본열도 곳곳에도 대가야의 흔적이 숱하게 널렸고, 대가야의 이주민들이 왜에 뿌리내린 유적도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왕실의 조상이 대가야나 금관가야의 후예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특히 대가야 역사의 전모는 여전히 복잡한 실타래로 얽혀있다.

학자들간 견해가 엇갈리는 쟁점과 풀어야 할 과제도 쌓여있다.

△가야 역사의 시발점 △문헌상 연대의 신빙성 △가야제국의 규모와 나라이름 △대가야 영토와 지배범위 △대가야의 정치사회 발전단계 등이 그것이다.

가야 역사의 출발점을 삼한시대 변한 소국(小國)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것인가, 아니면 200년대 후반~300년대 초반으로 잡을 것인가는 여전히 첨예한 쟁점이다.

이와 맞물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본서기에 기록된 가야사의 연대를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2주갑(120년) 또는 일정 시기 뒤로 잡을 것인가도 면밀한 고증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대가야 세력권이 어디까지 미쳤으며, 이 중 직접 또는 간접지배 지역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도 발굴과 자료축적 등을 통해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특히 최근에는 가야(특히 대가야)의 사회발전단계가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국부터 소국연맹체, 단일연맹체, 부체제, 고대국가 단계까지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문헌 및 고고자료의 종합적인 분석과 전문가들의 활발한 토론이 이견을 좁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쟁점과 함께 왜(倭)계 무덤, 껴묻이널(殉葬槨)의 사람 뼈, 대가야 철산지, 각종 철기 등의 비밀을 캐내는 작업도 가야사를 재정립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다.

최근 대가야 세력권 안에 일부 왜계 무덤이 나타나고, 영산강 유역에는 전형적인 왜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나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그동안 '임나일본부설'이란 민감한 문제와 뒤얽혀 학자들도 왜계 무덤에 대한 연구를 애써 외면해왔다.

그러나 가야-왜의 관계, 임나(任那) 문제 등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 왜계 무덤은 반드시 파헤쳐야만 할 과제다.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나온 껴묻이널의 사람 뼈는 향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고, 합천 야로의 불묏골 유적발굴을 통해 대가야 철산지를 규명하는 것도 뒤따라야할 작업이다.

대가야 유적지에서 나온 각종 철기의 금속공학적 분석도 시급한 과제다.

이를 통해 철의 재질, 사용연대, 제작기법, 유통경로까지 파악함으로써 '철 왕국'의 신비를 벗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 빼앗기고 각지로 흩어진 유물의 반환과 수집, 산재한 유적지에 대한 문화재 지정, 나아가 대가야 역사복원 프로젝트의 국책사업화 등도 장기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다.

그동안 사학자와 고고인류학자, 금속공학자, 향토 사학가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대가야사가 어느 정도 정립됐다.

대학 박물관과 문화재연구원 등 기관들도 대가야사 규명에 한몫했다.

이제 대가야 역사를 제대로 확립하고 올곧게 보존하는 일은 지방자치단체와 정부(문화재청, 문화관광부)의 몫으로 남았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사진: 지난 1994년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한 고령 지산동 30호고분의 봉토조사 당시의 전경. 이 고분 순장곽에서 발굴된 어린이 금동관은 순장제도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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