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원나라 지배 고려사회 변화상

입력 2004-06-04 08:56:47

40년 전쟁 끝에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원나라의 수탈은 끝나지 않았다.

원의 지배와 수탈이 계속되면서 고려사회에는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변화의 현장을 둘러봤다.

-전문-

충선왕, 충숙왕, 충렬왕, 충목왕, 충혜왕 등 왕의 이름에 '충성 충'자를 달기 시작했다.

고려왕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원나라는 고려왕의 임명과 폐위 및 복위를 마음대로 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은 모두 한번씩 폐위됐다가 복위됐다.

충선왕은 재위기간 내내 연경에 머물며 고려를 통치했다.

선비와 관료들 사이에서는 몽고어 열풍이 불고 있다.

사서오경에 다소 약해도 몽고어에 능숙한 사람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통역관이었던 조인규와 유청신은 역관출신이지만 고위관직에 올랐다.

과거에 합격해도 몽고어에 미숙하거나 원나라에 적대적인 관리는 발령 받지 못하거나 변방을 전전했다.

양인이나 천인 중에는 매 키우는 일을 업으로 사람들이 생겨났다.

원나라가 조공품으로 해동청(海東靑:사냥매)을 잡고 길러서 보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려 정부는 이를 전담할 기구 응방을 설치해 매를 잡고 훈련시키고 있다.

응방은 개경을 중심으로 지방의 역(驛)과 외군(外郡)에 설치돼 있다.

고려정부가 매사냥에 열을 올리자 매를 잘 잡고 훈련시킬 줄 아는 자들은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를 저질렀다.

매는 원나라뿐만 아니라 고려의 왕에게도 바쳐졌다.

민간인들 사이에는 조혼풍습이 생겼다.

이는 원나라에 보낼 처녀공납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갓 10세를 넘긴 여자아이를 시집보내거나 딸을 숨기는 부모들이 많았다.

처녀징발이 어렵자 고려정부는 결혼도감을 설치했다.

1275년(충렬왕 1)부터 1355년(공민왕 4)까지 약 80년간 원나라 왕실에 바친 여자의 수는 150명이 넘었다.

(이곡이 원나라 어사대에 올린 글에 의하면, 매년 1, 2회 혹은 2년에 한번 고려는 여자를 바쳤는데 많을 때는 한번에 40,50명에 이른다고 했다)

고려의 여자들이 원나라의 왕실에 가득하자 고려풍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 원나라 관료들 사이에서는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고관대작으로서의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유랑하는 농민들도 증가하고 있다.

오랜 전란 이후 권문세족들이 농장을 크게 늘리면서 양인 수가 줄어들자, 남은 양인들의 조세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과중한 조세부담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토지를 권문세족에게 바치고 소작농이 되거나 토지를 버리고 유랑을 택했다.

특히 원 지배지역인 요양, 심양, 북경, 쌍성, 동진 등 국외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나라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소주나 상화(속을 넣어 찐 만두의 일종), 포도주, 설렁탕과 같은 색다른 음식도 고려에 퍼지고 있다.

불교 영향으로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했던 고려인들에게 설렁탕은 별스러운 음식이다.

특히 소주는 몽고인들이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들로부터 수입한 문화인데 원나라 침략 이후 경상도 안동을 중심으로 전파되고 있다.

원나라가 제주도를 목장으로 개발하면서 농업을 버리고 목축업에 투신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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