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문화유산-예천 명봉사

입력 2004-06-04 08:57:36

예천읍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승용차로 25분정도 가면 소백산 자락 해발 500m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명봉사(鳴鳳寺)가 나타난다.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1번지에 위치한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깊은 산중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해서 명봉사로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명봉계곡의 울창한 수목과 맑은 물을 접하는 순간, 선경(仙境)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사찰은 한창때 100칸이나 되는 매우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날의 번창했던 모습은 볼 수 없고, 법당과 요사채만 복원돼 있다.

대웅전 안에는 6.25 전쟁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이 보관돼 있고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가 에워싸듯 경내를 가려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낀다.

명봉사 대웅전 옆 모퉁이를 돌아서면 지난 1975년 2월 보물 제682호로 지정된 조선조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가 자리하고 있다.

절 동쪽 숲속에는 지난 1972년 12월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鏡淸禪院 慈寂禪師 凌雲塔碑)가 당시의 번성했던 사찰의 모습을 증언한다.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

조선 왕실의 태(胎)를 명당이나 명산에 묻어 성장과 성공을 기원했다는 태실(胎室)과 태봉(胎封)은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이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한 뒤 태실을 봉안하고 그위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명봉사에 자리하고 있는 문종대왕 태실비는 대구.경북에 현존하는 몇 안되는 태실비 중 하나다.

문종대왕 태실비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명봉사 사적비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의 태실비를 각인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840년에 세웠다는 명봉사 사적비는 문종대왕 태실비 보다 조금 크지만 형상과 모양, 낡은 정도가 같고 비문을 다시 각인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도세자 태실비의 비문을 깎고 그위에 명봉사적 비문을 새로 새겼다는 것이다.

조동윤 예천군청 문화관광 과장은 "전문가들은 명봉사 사적비를 사도세자의 태실비로 추정하고 있다"며 "비극의 주인공이 또다시 비극을 맞은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영조11년(1735년) 화강암으로 조성돼 현재 법당 옆에 서 있는 문종대왕 태실비는 높이 2.46m, 비신높이 1.13m, 폭 0.57m, 두께 0.25m로 문종대왕의 태를 안치하고 세운 비석(碑石)이다.

원래 대웅전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때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 비는 구질(龜跌)위에 화강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귀부가 한돌로 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같이 하여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고 이수는 방형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으로 양각해 놓았다.

몸체에 비해 귀부의 처리기법이 둔중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비신 앞면에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 胎室)' 뒷면에 '숭정기원후 일백팔을묘(崇禎紀元後 一百八乙卯)'라 음각한 비명으로 보아 이 비의 건립연대가 영조 11년(1735)임을 알수 있다

#경천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鏡淸禪院 慈寂禪師 凌雲塔碑)

지방 유형문화재 제3호인 자적선사 능운탑비는 자적선사(慈寂禪師)의 부도탑비이다.

화강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전체 높이 2.91m, 좌대높이 0.52m, 비신높이 1.9m, 폭 0.96m, 두께 0.20m로 고려 태조 24년(941)에 건립됐다.

탑비는 귀부위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어 놓은 통일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비이다.

이두문자(吏讀文字)로 새겨진 이 석비는 비바람에 마멸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76년 단국대 남풍현 교수의 판독에 따르면 신라에서 고려로 접어드는 시기의 과도기적 이두문자로 당시 중앙관서인 광평성에서 승도에게 내린 행정적인 공문서다.

이두가 행정적인 양식으로 쓰여진 것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경주 남산 신성비와 일본 쇼수인 소장의 신라장적 정도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라시대의 이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구비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상과 문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두문으로 된 이 비문은 고려 초기에 한림원령(瀚林院令)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장가 최언위(崔彦僞)가 지은 것으로 판독됐다.

자적선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법명은 홍준이다.

선사는 신라 헌강왕 8년(882)에 태어나서 효공왕 3년(899)에 수계하였으며, 고려 태조 22년(939)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대사에게 자적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부도탑은 능운이라 이름하였다.

자적선사 능운탑비는 숲 속에 방치돼 오던 것을 예천군이 지난2001년 사업비 4천만원을 들여 보호각을 세우고 주변을 정비했다.

예천.마경대기자 kdma@imaeil.com 사진: 오른쪽 문종대왕 태실비. 왼쪽 명봉사 사적비로 변한 사도세자 태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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