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클릭-"디카가 넘 좋아"

입력 2004-05-31 08:59:46

며칠 전 직장인 박모(39.대구 남산1동)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기분 좋은 소주 한잔에 평소보다 '오버'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술에 취해 신나게 놀던 그의 모습을 장난기 발동한 누군가가 디지털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던 것. 다음날 동참했던 동료들에게 e메일로 그 날의 '증거'가 전송됐고 박씨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현대인의 신종 파파라치, 일명 '디카족(族)'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디지털카메라가 휴대전화 만큼 친숙한 휴대품이 된 요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기억'하는 대신 '기록'한다.

도서관을 찾았을 때도 찰칵,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도 찰칵, 심지어 불판 위에 삼겹살이 선홍색으로 변해가는 기념으로 찰칵. 모든 사물과 일상생활이 24시간 내내 모조리 카메라에 담긴다.

'디카'는 단순히 사진 찍는 도구에서 벗어나 세대와 계층을 초월한 문화 상품으로, '디카족'은 새로운 문화코드로서 각광받고 있다.

◇일상의 언어가 된 '디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한 지 8개월 정도 된 정영희(26)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디카족이다.

그녀는 항상 디지털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며 하루에 100여장이 넘는 사진을 찍는다.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무엇을 찍을지 고민하죠. 길에 서있는 전봇대, 지나가는 사람, 음식, 액세서리 등 형태가 있는 모든 사물이 촬영 대상이에요".

2000년 말 일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디카 문화는 지난해 신세대들에게 라이프스타일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디카와 함께 나타난 '디카족'은 디지털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며 일상생활 속에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 공간에서 선보이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

디카족들의 문화는 '댓글'과 '드러내기'로 요약된다.

'댓글'은 간단한 제목이나 설명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을 올려놓으면 이에 대해 한두 줄 가량의 '촌평'을 다는 것. 또 자기를 알릴 수 있는 것이라면 주변의 어떤 것도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게시판에 올려놓는다.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 com)는 디카족들의 문화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웹 사이트이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올려놓으면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면서 사진에 대한 평가가 즉석에서 이뤄진다.

밤새도록 디카 관련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리플을 읽는 사람들을 뜻하는 '폐인'이란 유행어와 2002년 '에헤헤' 웃음소리의 오타에서 출발한 '해ㅎ해ㅎ단어의 진원지가 바로 이 곳이다.

'디카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또 다른 사이트는 '싸이월드'(www.cyworld.com). 디카 사진을 무한대로 올릴 수 있는 이 곳에 한 달에 등록된 사진만 600만∼700만장이나 된다.

디카족은 하루의 일과 중 재미있었던 일을 사진으로 남겨 블로그에 올리고 일기를 쓴다.

첫눈 오는 날의 설렘, 비 오는 날의 우울함, 맑은 가을 하늘 등 하루의 풍경과 기분을 사진에 담는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사진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디카, 세상을 놀라게 하다

두건이 씌워진 채 고문을 당하는 이라크 포로, 발가벗긴 포로들을 포개 쌓은 피라미드 곁에서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웃고 있는 린디 일병. 세계인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미군에 의한 이라크 포로 학대는 디지털 카메라가 없었다면 고스란히 묻힐 뻔한 진실이었다.

미군들이 재미 삼아 동료끼리 돌려보던 '디카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는 순간 미국은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의심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단순히 엽기적이거나 재미 위주로 만들어지던 합성 사진이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게 되면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합성사진, 혹은 패러디 이미지가 유행하는 것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지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네티즌들이 글보다 명료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패러디 사진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7대 총선 당시, 정치 풍자만화 '대선자객' 시리즈나 민주당의 KBS 항의 방문을 빗댄 '물은 셀프'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디카 문화 어떻게 볼 것인가

디카의 가장 큰 매력은 '즉시성'과 '대중성'이다.

필름값 부담도 없고 찍은 영상을 즉시 확인해서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지우면 된다.

또 디지털 카메라는 일반인들을 이미지의 단순한 수용자에서 능동적인 생산자로 바꾸어 놓는다.

디지털 카메라 사용자들은 이미지의 주체적인 생산자이길 원하고, 이미지의 생산 과정이 즐거운 놀이이기를 욕망하며, 다른 사람과 이미지를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소통의 관계들을 만들고자 한다.

영남대 사회학부 주형일 교수는 "디지털 카메라는 디지털 기술과 영상문화 사이에 마련된 문화적인 접점"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영상을 보여주고 공유하는 문화인 '이미지 커뮤니케이션'이 개인화되고 소원해지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가깝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기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계명대 광고영상학부 양정혜 교수는 " 디카 문화의 과열은 도를 넘는 사생활 침해 논란을 불러올 수 있고 자기 정체성의 표현 방식이 이미지로 획일화돼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며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고 흥미나 재미 위주로 가다보면 문화가 지나치게 가벼워질 수 있다"고 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사진: 디카의 묘미, 생생한 순간을 포착한다. 사고가 난 자동차가 벽을 타고 올라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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