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탄핵심판 이후 우리의 과제

입력 2004-05-14 13:12:38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마침내 종결되었다.

전국에 방영될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불러 모은 사건이었지만, 심판 자체는 정작 싱겁게 끝났다.

헌법재판이라는 것이 본래 법의 '적용'보다는 법의 '해석'을 다루기도 하지만 총선에서 민의가 확인된 이후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방송된 선고과정은 결코 '극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재미있었던 모든 식전 행사를 갈무리하는 단순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탄핵심판은 실제로 우리가 성숙한 민주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탄핵심판은 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회를 통합할 수 있다.

탄핵의결은 소란스럽고 극적이었지만, 탄핵심판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탄핵의결이 극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분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탄핵의결이 사회 분열의 원인이기보다는 사회 구성원들의 적대적 대립이 탄핵정국을 야기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의 편에 서지 않으면 모두 적이라는 무자비한 이분법이 창궐하였고, 상대방을 자신과의 대척점으로 모는 극단주의가 횡행하였다.

이성보다는 감정의 목소리가 커지고, 선정성이 명료함으로 혼동되고, 법치주의에 대한 호소 자체가 정략적으로 오해되는 자극적 상황에서도, 우리는 끝까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렸다.

우리가 즉각 행동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민주적으로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억압을 당하고 또 억압하였던 권위주의 시대에 우리는 기다릴 줄 몰랐다.

억압이 직접적이고 폭력적이었던 만큼 저항도 극단적이었다.

하물며,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탄핵의결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과연 어떠했겠는가? 그래도 우리 사회는 비교적 평화적인 방법으로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기다렸다.

우리는 비로소 직접적 대결을 피하고 간접적인 화해와 융합의 방식을 배우게 된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조용한 판결은 이렇게 구시대의 적대적 정쟁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법치주의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첫째, 헌정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탄핵심판 역시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법이 오용되어 종종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공공연히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은 본래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합리성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몇몇의 실증법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해서 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정당성의 관점에서 합법성을 해석함으로써 법이 권위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둘째,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사회를 구성하는 어떤 집단도, 설령 그 집단이 다수라고 할지라도, 완전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적대적 정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법이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결코 같은 의견, 같은 사상,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지도자라도 '독재'는 부패하고,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독선'은 부패하는 법이다.

국회에서 통과된 다수의 탄핵의결은 부당한 것으로 결정되고, 소수의 정권이었던 노무현 정부는 이제 사회를 주도하는 지배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을 물리적 폭력 없이 민주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바로 법치주의라면, 우리는 이제 다수에 자만하지 말고 소수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탄핵의결에 반대한 민의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헌법재판소의 합리적 '절차'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한다.

이제는 이념도 힘을 쓰지 못하고, 지역주의도 맥을 못 춘다.

국민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이념과 어떤 정책이 '더 합리적인가?'이다.

모든 것은 탄핵절차를 거쳐 단순히 제자리로 되돌아 온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극단적 대립과 비생산적인 이념논쟁을 떨쳐버렸기에 실제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이다.

다양한 사상과 이해관계를 통합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길 기대해 본다.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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