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 대기자의 책과 세상-강아지 똥

입력 2004-05-08 09:03:25

많이들 조용해졌다.

삐뚠 입들로부터 쏟아지던 패악에 가까운 험한 말들이 한풀 꺾이고 다들 자세를 가다듬는지 조용하다.

조용해서 좋다.

하지만 너무 조용한 것이 탈은 아닐까. 그런 것이 또 걱정이다.

당신은 걱정도 팔자. 그런 걱정의 진원지를 한번 뇌어 볼까. 여전한 인기 검색어들. 탄핵, 보수, 촛불, 진보, 감성, 포퓰리즘, 안티, 삼보일배, 방송, 민노, 그리고 386. 얼큰해진다.

그 후 세상은 바뀌었는가. 어떻게? 아니면 세상은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고 승자와 패자만 갈라놓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더 불안해하고 그래서 그들은 더 우쭐해하지는 않는가. 그들은 왜 불안해야 하고 그들은 왜 우쭐해야 하는지 알기나 할까. 그것이 모두 국민의 한 표 한 표에서 끌어 당겨 이리 해석하고 저리 풀이해 언제나 물밑 같은 민심의 행방을 마치 꿰뚫은 듯이 똥 덩이 굴리듯 인기 검색어들 사이로 어지럽게 굴리지는 않을까. 이런 것도 걱정이다.

오늘 아침. 모진 지난 겨울을 이겨내고 새 싹을 틔워 빡빡한 주위 환경에도 불구하고 불쑥 줄기를 솟아 낸 민들레 한 포기를 보았다.

원줄기가 없는 민들레는 잎이 뿌리에서 나와 옆으로 퍼지는 게 특색이다.

그 줄기 끝에는 희끄므레한 솜털 같은 관모가 붙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저절로 바람에 날리는 솜털. 왜 우리의 걱정은 저러질 못할까. 민들레 솜털 보다 못한 우리의 걱정들.

민들레와 얽힌 책 하나. 경북 안동에서 소리없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펴고 있는 아동문학가 권정생씨의 '강아지 똥'이 그 책이다.

흔히 동화책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동화책은 구분을 잘게 해 어린이가 읽는 동화책,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책, 어른이 읽는 동화책 등 되레 어렵게 해 놓고 있지만 그게 그거다.

'강아지 똥'은 위 구분 어디에도 통하는 책. 어른이라고 피해 갈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강아지 똥'은 이미 1969년에 '기독교 아동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 눈길을 별로 주지 않고 아름 아름으로 아이들에게 읽혀졌지만 지난 96년 새롭게 그림 그리고 장정해 단 권으로 내놓자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해 지금은 스테디 셀러. 해마다 판매 부수가 늘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CD도 만들고 연극으로 무대에까지 올려지며 꾸준히 인기를 끈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강아지 똥을 모를 리가 없을 정도다.

짧은 소품이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시골 마을 강아지가 길에다 볼일을 본다.

덩그러니 놓인 강아지 똥. 지나가는 참새와 병아리들 마저 냄새난다며 구박하고 농부도 더럽다며 외면하는 강아지 똥. 그러자 강아지 똥은 하잘데 없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그 때 절망하는 강아지 똥을 포근하게 감싸는 민들레. 강아지 똥은 거름이 되어 민들레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뿌듯하게 피어나는 책도 드물 것이다.

물론 어린이들에게는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심어주는 이득도 있지만 그보다는 권씨의 강아지 똥과 흙덩이를 다루는 그 특이한 문체와 사물을 글로 이렇게 표현 할 수 있다는 안목이 놀라운 책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아무리 미천한 물건이나 사물이라도 제각기 할 일과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 누구에게나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자신감을 심어주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눈을 틔어 주는 책이다.

누구에게나 실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도 " 인생은 열 살 때는 과자에 움직이고, 스무 살 때는 연인에 , 서른 살 때는 쾌락에, 마흔 살 때는 야심에, 쉰 살 때는 탐욕에 움직인다"고 했듯이 늘 인생을 움직이는 어두운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아지 똥은 그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민들레의 도움으로 적확하게 안 것이다.

최근 두 사람의 청와대 출신들의 눈물겨운 법정 진술들이 보도되자 많은 이들의 가슴을 한 때나마 분간키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잠시나마 지녔던 서슬퍼런 시절을 회상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게 어떤 도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강아지 똥같은 자신의 의무를 지녔다면 지금의 그 모습들은 보여 질 리가 없을게다.

문제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런 모습들이 보여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속담에도 있듯이 똥 싼 놈은 달아나고 방귀 뀐 놈만 잡힌다고 오늘의 복잡하고 남을 못살게 구는 현실에서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계속될 것이고 법정에서 방귀 뀐 사람들의 눈물은 하염없이 흐를게 뻔하다.

도대체 똥 싼 놈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똥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그렇지만 강아지 똥을 빼고 나면 어디 똥 같은 똥 이야기가 있었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