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새로운 정치를 기대한다

입력 2004-05-04 11:31:20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양쪽이 다 당의 정체성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실 그런 고민은 선거 후가 아니라 선거 전에 했어야 하며 무엇인가 앞뒤가 뒤 바뀐 느낌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여야가 서로를 헐뜯기만 하는 작태에서 벗어나 정책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정치가에게 권력이 생명이긴 하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볼때는 권력은 정치를 잘한 결과로서 얻는 것이어야지 마치 권력추구 자체가 정치의 목적인 양 대중 선동을 위한 요령부리기에 주력하는 일은 이제 용납될 수 없다.

이번 총선이 국회에 보낸 가장 큰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의 정체성에 관한 여야 거대 정당들의 논의는 어떤 식이 되어야 하나?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거대정당들의 정책노선에 관한 논의가 이념논쟁이 될 필요가 있을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를 살려 생산적 복지체제를 구축하는 일을 국정운영의 목표로 인정한다면 사실상 이념적 논쟁의 필요성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자유, 평등, 정의의 이상을 부정하며 사회복지의 하한선을 계속 높임으로써 시장경제에서 파생하는 비인간화의 부작용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정치인이 있겠는가. 이름은 민주주의라도 사회민주주의라도 좋다.

문제는 어떤 구체적 절차와 방편을 통해 이상과 목표를 달성해 나갈 것이며 현실성 있는 좋은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얻기 위해 각 정당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무엇보다도 가장 긴급하고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부를 생산하는 일과 그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이 어떻게 서로 상충하지 않고 보완이 될 수 있도록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이룩해 내는가 하는 것이다.

치열한 세계경쟁 구조속에서 우리가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몫이 커질 수 없음은 고사하고 생계유지에 절대 필요한 자원확보조차도 어렵게 될 수 있다.

철강이나 기름 파동만 아니라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반면에 분배의 문제를 게을리 한다면 소비가 위축될 뿐 아니라 사회불안으로 공동체의 유지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전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 몸부림과 북한의 참상을 눈앞에 보면서도 체제의 성격에 상관없이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인구가 30%를 넘어섰다는 어처구니없는 통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는 대외관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도 중국의 도전을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주변의 강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중국의 세력이 급부상한다고 절대적 패권국이며 전통적 우방인 대미 관계를 등한시하고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다해서 러시아를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천연자원이 매우 부족한 우리가 앞을 길게 내다보며 가까이 하고 다져야 할 새 이웃들은 누구인가.

세 번째로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정보와 시대, 문화의 시대에 걸맞게 국민의 의식을 계도하고 국정운영의 방식을 혁신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개혁과 진보를 가장 크게 외치는 사람들일수록 구 시대의 사고방식이나 사회관계 운영양식에 젖어서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과거에만 얽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이제 여야의 지지도를 결정하는 것은 이념 차이가 아니라 현실적 정책 추진 능력일 것임이 분명해진다.

서로 싸우는데 쓰던 정력을 굵직한 현안추진에서 협동이나 건설적 비판을 하기 위해 쏟을 때 여야는 적이 아니라 서로 존경하는 맞수가 되고 국회는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대의기관이 될 것이다.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전주러시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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