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근혜 대표님께

모처럼 비가 왔습니다.

며칠 째 그야말로 '철' 모르고 여름 흉내를 내던 날씨를 다독거리고, 가뭄으로 타들어가던 농심을 아쉬운 대로 어루만져 준 고마운 비입니다.

아울러 그동안 선거로 뜨거웠던 우리 일상의 열기를 한 풀 가라앉혀주는 비인 것 같기도 하구요.

대표님, 좀 쉬셨는지요? 너무 많은 사람과 악수를 한 탓에 손에 붕대를 감고 다닐 정도로 강행군 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종종 뵈었습니다.

힘은 드셨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게 나와 큰 일을 치른 뒷마음은 한결 가벼우시리라 생각합니다.

선거 후에 언론에 비쳤던 대표님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았던 걸로 보아 대표님도 대체로 만족하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서론이 조금 길었군요. 대표님과 아무런 안면도 없으면서 이렇게 불쑥 글을 올린 결례에 대하여 우선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뜬금없이 대표님께 글을 올리게 된 사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태어나 지금까지 경상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재작년 초여름이니까 이른바 'TK'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만 2년이 채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말씀드려 TK에 대해서는 아직 특별한 애정의 감정이 없습니다.

요컨대, TK 주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TK와는 아직 어떤 스캔들도 없는 셈이지요.

이런 까닭에 저는 TK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나타난 이곳 표심에 대해서 말들이 많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탈색되지 않고 있는 그 강고한 지역주의적 색채에 대해 외부로부터 비판이 쏟아지지만 저는 때로는 묵시적으로 또 때로는 혀를 차는 정도로 동의를 표시함으로써 면피를 하곤 합니다.

나는 TK가 아니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저로 하여금 'TK를 위한 변명' 따위는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개운치 않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특히 앞으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지금 사는 곳에서 보내게 될, 또 그럼으로써 경상도가 실질적인 고향이 될 제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런 태도야말로 누워서 침 뱉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거결과를 두고 다른 지역도 '싹쓸이' 현상이 나타났는데, 왜 유독 대구.경북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볼멘 이야기도 주변에서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런 항변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같은 싹쓸이더라도 다른 지역은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하며 시대의 변화를 읽은 흔적이 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대구.경북의 경우는 변화를 거부하는 정지된 의식의 결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역의 싹쓸이는 그래도 앞을 내다보는 측면이 있지만, 이 곳의 싹쓸이는 철저하게 과거지향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과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볼모로 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며 미래로 자신을 던지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에서 대표님은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상징하는 기표였습니다.

반면에 이곳 유권자들의 그런 심리는 또 대표님과 한나라당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산입니다.

TK와 한나라당은 서로 그렇게 볼모가 되고 또 그렇게 어루만지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듯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는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구.경북 지역사람들에게 왜 지역주의의 극복을 위해 몸을 던지지 않느냐고 무턱대고 질타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것은 사명감 하나로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턱없이 과도한 수준의 도덕적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그런 의제를 꾸준히 이슈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대표님께 글을 올리게 된 이유입니다.

중보고 제 머리 깎으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구.경북 사람들은 이번에도 상처뿐인 한나라당을 보듬어 주었습니다.

대표님과 한나라당은 여기에 대해 당연히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답이 지금까지 처럼 상처의 본질은 외면하며 애오라지 'TK의 자존심'만 들먹이는 방식이라면 희망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 대한 분노는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한나라당에 되돌려질 것입니다.

대구.경북 사람들과 한나당의 오랜 인연이 그런 식의 악연으로 마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쓰다보니 결국은 에둘러 말씀드리고 말았군요. 대표님의 건승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