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이제, 일상을 다독이고 싶다

입력 2004-04-17 11:16:14

이달치 카드결제대금 청구서를 보니 자동차 연료비 합계가 다른 달 보다 많이 나와 있다.

장거리를 잘 다니지 않는 터라 연료비가 평균 수준을 유지하는 편인데, 지난달에는 유난히 많이 다녔나 보다.

아, 꽃이 피는 달이었지. 난 봄이 되면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마른 가지에 하나둘 꽃망울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마치 그로 인해 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동동거리다가 결국에는 우울해지고 만다.

이런 봄앓이를 해마다 하면서도 쉬 도시를 벗어나 들판에 가보지 못한 채 봄을 지나기 일쑤였다.

늘 지갑이 마음에 걸렸고, 규모 없이 분주한 일상이 발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대구 북구 쪽에서 팔달교로 나 있는 신천대로를 자주 이용한다.

그 구간의 도로 가운데 있는 화단은 언제 봐도 보기 좋다.

봄의 첫 소식을 알리는 갖가지 꽃나무로 가꾸어져 있어서 나는 이곳에서 먼저 화려한 봄을 눈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꽃들이 눈부실수록, 화단이 화려할수록 나는 더욱 들판의 마구 피는 봄이 그립다.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진 봄은 이미 봄이 아니기 때문이다.

봄은 마구 솟아나는 생명이다.

봄은 내 발 밑에서부터 기어이 땅 위로 올라오고야 마는 아름다운 자유다.

이러한 봄은 도시에는 없다.

줄 세우고 다듬은 도시의 봄은 생명과 자유를 오히려 목말라하게 부추긴다.

그래서 흐드러지는 봄을 보고 싶어 봄철 내내 내 눈은 도시 먼 주변을 맴돌게 된다.

올해는 이 생명과 자유를 누리려고 작정을 했다.

그래서 초봄부터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쪼개어 모았다가 더러더러 도시를 벗어나 보았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함부로 자라는 생명과 자유가 있었다.

지난 대통령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날은 남쪽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라디오로 듣는 국회 소식에 돌아갈까 하다가 그냥 갔다.

사람에게 닫힌 마음은 자연에서 풀라고 했던가. 하지만 남쪽의 고운 봄에 오히려 눈물이 그렁거렸다.

환한 빛 때문에 탄핵 현실이 더 어둡게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연은 아름다운데 인간의 세상이란 얼마나 암울한지. 그 날 이후 난 야외로 나가지 않았다.

한달 동안 신천대로의 꽃이 차례대로 불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걸 보면서 여전히 들판을 그리워하기만 했지 나가진 않았다.

봄을 담을 마음 그릇이 걱정과 분주함과 말(言)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누리지 못한 봄이 그렇게 지나갔다.

총선을 앞두고 쏟아지는 말, 특히 이번은 넘치는 토론장면이 사람들의 귀를 잡았다.

때론 비방으로, 때론 원망이나 고발의 말들 때문에 내 마음은 한달 내내 비어있지 못했다.

마음뿐이랴. 아직 겨울옷이 그대로 옷장에 걸려 있고, 봄여름 옷가지들도 꺼내놓지 못했다.

우리 모임의 봄세미나가 총선 이후로 연기되었으며, 노회에서 설립 허락받은 내 상담연구소도 아직 오픈하지 못했고, 이번 학기 학생들에게서 받은 리포트도 못다 읽었다.

자료며 책들도 여기저기 되는 대로 쌓여 있기만 하고, 봄이 되면 베란다 화분에 상추씨를 뿌리려던 생각도 아직 계획 중에 있다.

물론 냉장고 야채칸도 오래 전에 비었다.

탄핵에 이은 총선이 그 유일한 이유일까만 내 생활은 지난 한 달간 그대로 유보되었다.

총선이 이제 끝났다.

누구는 희망하고 누구는 좌절한다.

그리고 또 누구는 여전히 시큰둥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이 가다가 되돌아 뛰어와 마감 2분전에 투표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때문에 나는 기분이 참 좋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노랫말이 옳다.

이런 사람이 있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거다.

바라건 바라지 않건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

이제야 등꽃 향기도 맡아지고 산수유 이파리의 줄무늬도 제대로 보인다.

이번 주말은 오랜만에 정치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일상을 다독이고 싶다.

내 중딩 조카에게 메일도 보내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동생도 찾아가 봐야겠다.

무엇보다 내일은 동네 세탁소부터 들러야겠다.

텁텁한 겨울옷을 나도 이제 정리해야지. 따라나설 우리 강아지는 또 얼마나 좋아할꼬.

정금교(만남의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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