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절차적 정당성과 승복의 문화

입력 2004-04-13 13:47:20

이른바 '탄핵 후폭풍'의 위력이 여전히 잦아들 줄 모르고 있다.

공식적인 선거운동 기간으로 접어들면서 탄핵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각종 집회들은 잠시 숨을 고르는 형국이지만, 그 대치국면은 진작부터 선거판으로 옮겨가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며 선거판의 모든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선거 때가 되면 항상 표면화되곤 하던 세대간 갈등도 이번에는 탄핵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대결구도로 확연히 갈라지는 모습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정작 헌법재판소의 심판 이후가 더 큰 문제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약 헌재에서 탄핵이 받아들여진다면 탄핵소추의결 때 못지않은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되고, 반대로 탄핵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보수단체를 필두로 헌재의 심판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선거 이후로 예상되는 헌재의 심판이 선거에서 표출된 민의와 배치되는 방향으로 내려질 경우, 그에 대한 반발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탄핵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헌재의 심판 이후 취해야 할 국민의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헌재의 심판이 어떻게 내려지든 이번 사태가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라는 일부의 지적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주목을 받을 만하다.

탄핵 정국과 관련된 각종 토론회에서 단골로 등장한 의제 가운데 하나가 탄핵과 민주주의의 상관성이라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결국 작금의 탄핵 정국은 정파간의 유불리(有不利)를 떠나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는 한층 고차원적인 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민주주의란 목적적인 가치가 아니라 수단적인 가치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바람직한 제도적 장치이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에서도 보듯이,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민주주의가 특정한 공동체에서 하나의 정치적 이념이 받아들여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절차적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한편,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이 절차적 정당성은 다수결의 원칙과 승복의 문화라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요소들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절차적 정당성은 어떤 사회적 결정이 그 사회구성원들 다수가 합의한 규칙들을 준수하면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 즉 다수결의 원칙과 '합법성'의 여부에 의해 획득된다.

소수의견에 대한 보호 역시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가치 가운데 하나이지만, 일단 다수결의 원칙과 합법성에 의해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된 사회적 결정에 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 존립과 관련된 보다 본질적인 가치이다.

일련의 탄핵정국에서 다수결의 원칙과 승복의 문화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들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의 여부를 떠나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이미 국회의원 다수의 의결로 가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헌재의 심판이다.

헌재 역시 국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헌법상의 최고 재판기관이며, 헌법재판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양식을 가진 법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명예를 걸고 현명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따라서 헌재의 심판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에 하자가 없다면, 우리는 개인의 정치적 신념에 관계없이 깨끗이 그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규칙들과 관련된 사안이며, 더구나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조차 승복을 거부하는 것이 관행이 되다시피 한 우리의 정치문화에서 이런 전통을 쌓아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탄핵정국에서 벌어지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이처럼 거시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처해 나갈 때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곧 기회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탄핵을 계기로 시험대에 오른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차원 더 성숙시키는 길이다.

심우영(한국국학진흥원장.전 총무처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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