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15)임금 얼굴 한번 못본 정승, 윤증

입력 2004-04-07 09:11:31

송시열과 윤증은 운명적 관계였다.

윤증은 부친 윤선거(尹宣擧)에게 주로 배웠으나 송시열에게도 잠시 배운 사제관계였다.

그래서 노론의 정호(鄭澔) 등이 윤증을 배사(背師)라고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숙종이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라고 꾸짖은 것처럼 둘의 다툼에는 윤증의 부친 문제가 깊게 개재되어 있었다.

현종 14년(1673) 윤선거가 사망하자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남인 윤휴와 가까이 지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성의없이 써 주었다.

송시열의 성의없는 비문은 "강화도 사건'江都之事'"이라고 불렸던 윤선거의 약점을 조롱한 것이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기로 했으나 윤선거는 살아남아 탈출했다는 것이 강화도 사건인데, 이후 그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재취(再娶)도 하지 않고, 벼슬도 포기한 채 향리에서 학문에 몰두하면서 평생을 마쳤는데, 당시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았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윤증은 송시열이 유배간 경상도 장기까지 찾아가 비문을 고쳐줄 것을 요구했으나 자구 수정에 그쳤을 뿐 글자는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써 둘 사이의 사제관계는 단절되었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을 의심하게 되었다.

윤증이 정사참여를 거부하고 낙향한 뒤 젊은 서인들이 그를 추종하면서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나 그는 한번도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숙종은 계속 높은 벼슬을 제수했는데, 재위 35년에는 드디어 우의정까지 내려졌다.

임금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정승에 제수된 것인데,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이를 "백의(白衣)로서 하루도 조정에 나아간 일이 없이 정승에 제배된 것은 윤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비문 사건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자신의 비문은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충남 논산의 그의 묘지에는 비문없는 '백비(白碑)'가 마치 그의 시대처럼 당심(黨心)으로 얼룩진 오늘의 세태를 꾸짖는 듯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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