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는 드디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의가 되었고 민의는 천명을 대신하는 것으로 적어도 입으로는 받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매우 딱한 일은 그 민의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도출해 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볼 여지가 별로 없이 살아왔다는 점이다.
우리보다 앞서 성공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나라들의 선례로 볼 때, 민의를 타진하는 가장 포괄적인 방법은 선거이다.
따라서 우리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여 그로 하여금 국정을 책임지게 하고,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국회와 정당들로 하여금 민의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대통령과 협조하거나 행정부를 견제하며 국민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도모할 수 있도록 헌법적 장치를 해 놓고 있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찌 정권 수립 과정에서 들어났듯이 그 민의라는 것이 흔히는 개개인의 깊은 체험과 성찰보다는 대중매체나 그밖의 다른 수단을 통한 의도적 조작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적어도 몇 년 앞을 내다보고 내려야 할 결정이 순간적 인상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그 뿐더러 이제는 민의의 간접적 행사에 만족하지 않고 시민 각자가 뜻맞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거리로 직접 뛰쳐나가 힘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추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노무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 구호에 의해 더욱 고무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는 이렇게 하여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피흘리고 어렵게 수호하며 쌓아온 민주주의의 질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에 부닥치고 있는 것인가.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에서 차분히 귀한 한표를 던지고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절대 다수의 이익이 국회보다는 국민의 이름을 내세우며 각종의 정치적 행동에 직접 참여하는 특정집단들에 의해 더욱 잘 수호될 수 있는 것인가.
다수의 의견이 곧 민의이고 국가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해 주는 최선의 대안을 창출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민주주의 발전 초기단계에서 참정권은 대체로 소수의 기득권층에 국한되어 있었고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2표를 주는 사례까지도 있었다.
시민의식과 시민적 책임 이행능력이 투표권을 행사하기에 걸맞은 수준에 이르렀을 때 참정권을 허용하는 것이 공동체 전체이익에 부합된다는 근거에서였다.
현대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마련한 루소도 이른바 '일반의지'와 '다수의 의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보수적 엘리트나 혁명적 엘리트에 의한 독재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대한민국 수립 당시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사실 국민 대다수가 참정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이의 제한 밖에 다른 어떤 차별도 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함께 부여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선거 부정과 비리, 투표권 남용이 발생할 것은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50여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지금에야 드디어 우리는 부정없는 참다운 자유선거를 치를 수 있는 성숙성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발달된 민주국가에서 다수의 의지가 일반의지, 곧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결정과 일치하도록 보장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권자 각자가 자기의 작은 사익에만 집착하며 솔깃한 선전과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구도자의 자세로 나라의 문제를 생각하며 자기안에 있는 최선의 국민적 의지를 읽어냄으로써 유권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뽑는 일은 미래를 설계하는 이성적 행위이지 과거의 실망에 대한 분풀이나 미지의 가능성에 대해 거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귀에 솔깃한 공약보다는 나라가 당면한 어려움에 대한 바르고 솔직한 인식과 타개책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의 검증이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경쟁과 도전은 나라 안이 아니고 밖에서 오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세력 팽창, 북핵문제가 내포하는 위험 등은 실업타파를 비롯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적 대안 마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들의 투자나 수출에 대한 우리 경제의 의존도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반미정서의 분출로 한미관계가 더욱 이완된다면 우리는 급속히 벼랑끝으로 몰릴 수도 있다'. 지금이야 책임있는 민의의 발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임을 증명해야 할 때이다.
단순한 다수의 의지가 아니라 절대 다수가 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선거를 통해 보임으로써 시민들이 국회를 믿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낭비스런 관행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다.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전 주러시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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