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눈부신 봄날의 외출

입력 2004-03-27 10:53:18

다 읽은 신문을 접어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끈과 가위도 준비한다.

베란다 한 귀퉁이에 폐지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다.

겨우내 블라인드로 가려둔 베란다의 풍경은 어둡고 칙칙하다.

장갑을 끼고 둘러보니 한숨 절로 나온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게을렀던가 증명이라도 하듯 먼지와 머리카락 뒤엉켜 자꾸만 내 뒤꿈치를 따라다닌다.

오전 열 시. 생기 넘치면서도 따스한 대기 허공에 출렁거리는 시간. 완강하게 줄 맞춰 드러누운 블라인드 틈새로 맑은 봄빛 기웃거린다.

조심스럽게 끈을 잡아당기자 블라인드는 곧 등을 곧추세우며 일어난다.

살구꽃처럼 화사한 햇살이 베란다를 가득 채운다.

햇살 아래 드러난 온갖 잡동사니들이 우두커니 나를 올려다보는 것 같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보름 전이었던가. 중학생인 막내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제부터 폐지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는 내게 막내는 의기양양 대꾸했다.

빈터에 고물상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그냥 버리는 폐지 가격이 1kg에 오십 원이나 하더란다.

그러니 잘 모아뒀다가 자전거에 싣고 가서 팔면 된다는 거였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까. 베란다 구석에 함부로 포개놓은 폐지에 눈길이 머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언짢았다.

막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알아서 하겠거니 방치한 결과였다.

허나 녀석은 폐지 따윈 까맣게 잊었는지 제 할 일만으로도 여전히 바빴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 게임을 하고 학습지를 푼 뒤 저녁 먹고 학원으로 내달리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니 언제 느긋하게 폐지를 꾸려서 자전거에 싣고 팔러 갈 시간이 있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약속을 지키라며 막내를 압박했다.

내 닦달이 계속되자 녀석은 슬며시 타협안을 내놓았다.

내가 폐지를 정리해서 묶어 놓으면 오늘 오후에라도 자신이 고물상에 다녀오겠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부끄러웠다.

어이없게도 나는 막내의 철없는 약속을 빌미 삼아 내 끔찍한 게으름을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내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 되어 한없이 굼뜨고 무뎌졌다.

모든 게 귀찮고 지겨웠다.

감각을 잃어버린 삶이란 어찌어찌 살아내야 할 하나의 형식에 불과했다.

마치 땀에 젖은 속옷을 입고 견딜 때처럼 축축하고 기분 나쁜 나날이 흘렀다.

하릴없이 뒹구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족들의 눈빛이 점점 뜨악하게 변해갔다.

그들이 더러운 화장실에 앉아 투덜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때 누렸던 뽀송뽀송한 삶을 잊지 못하는 그들은 내 직무유기의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 바랬다.

계절이 몇 번 바뀔 동안 나는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뒹굴면 뒹굴수록 잡념이 기승을 부렸고 급기야 나는 그것들에 목 졸리기 시작했다.

그 짓도 못 할 노릇이었다.

죽지 않은 다음에야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삶.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삶의 주인인가, 방관자인가. 대답은 고사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내 마음에 어둡게 드리워진 블라인드를 걷고 굳어버린 오감을 깨우는 일, 그리고 잡초 무성한 마음밭 깊게 갈아엎는 일….

베란다 창을 열자 봄바람에 스민 꽃내음과 바깥 풍경이 동시에 달려든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찬찬히 주변을 살핀다.

빈터였던 자리에 들어선 고물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집게차의 갈퀴손이 폐지를 잔뜩 움켜쥔 채 빙그르르 맴을 돈다.

작년까지만 해도 쑥과 냉이가 파릇하던 빈터에 이젠 온갖 고물과 폐지가 널려 있다.

빨간 운동복을 입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서 집게차를 향해 소리지른다.

낯설지만 앞으론 자주 맞닥뜨리게 될 풍경 아니겠는가.

차곡차곡 폐지를 묶는다.

오후에 막내와 같이 폐지 팔러 갈 생각을 하자 불끈 기운이 솟는다.

내친 김에 나는 입안에다 '봄나들이'를 넣고 돌돌 굴려본다.

마음이 박하사탕을 깨문 듯 환해진다.

문득 조용해서 고물상을 내려다보니 그새 집게차는 작업을 마쳤나보다.

나도 서둘러 청소를 한다.

내 삶의 자리를 유쾌하게 흔들어줄, 눈부신 봄날의 외출을 기다리며.

노정완(소설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