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성왕의 관산성 패전(554년) 이후, 백제에서는 그동안 위축돼 있던 귀족세력이 재등장했다.
국가의 실권이 귀족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때가 8성 귀족(사, 연, 해, 진, 국, 목, 백, 협씨)중심의 6좌평 체제였다.
귀족 중심의 정치에 제동을 건 이가 무왕(재위 600∼641)이었다.
그는 거대한 미륵사(익산)를 창건하고 불교를 통해 자신이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나섰다.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재위 641∼660)은 즉위하자마자 세력이 강한 귀족 40여명을 추방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다.
왕권 확립 후 의자왕은 신라 공격에 본격 나섰다.
신라 서쪽 40여성과 전략 요충지 대야성(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의자왕의 정벌전쟁은 신라의 '청병(請兵)외교'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고,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특히 귀족들이 국왕에 등을 돌려 백제 내부는 어수선했다.
이 같은 내부 분열로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던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고구려 멸망=백제의 신라 대야성 공격으로 성주인 품석과 그 부인이 백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신라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김춘추는 나라의 위기와 함께 백제에 개인적 원한을 품었다.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에게 군사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춘추의 청병외교는 당나라로 기울게 됐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대립을 피하고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대신들과 영류왕을 살해했다.
이후 보장왕(재위 642∼668)을 세워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당에 대해 강경론으로 일관했다.
당과 신라는 긴장했고 두 나라는 동맹을 맺었다.
당태종은 대규모 고구려 침공에도 실패를 거듭하자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다.
연개소문이 죽고(666) 고구려는 귀족세력간 다툼이 격해졌다.
이 틈을 노려 50만 당군이 요하 전선을 돌파했다.
남쪽에서는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다.
수.당과 연이은 전쟁으로 이미 기력을 잃은 고구려였다.
668년 보장왕은 결국 항복했다.
▷당과 맞선 통일전쟁=백제 멸망 후 당은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백제 점령에 들어갔다.
신라와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당은 또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영토를 지배했다.
게다가 신라의 영토까지 엿보았다.
당은 신라를 계림 도독부, 문무왕을 계림 도독으로 칭하며 속국 취급했다.
신라의 문무왕은 당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8년 간에 걸친 나.당 전쟁이 시작됐다.
문무왕은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했다.
맞불작전이었다.
동시에 백제지역 당군을 격파하고 웅진 도독부 82성을 되찾았다.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선포해 내부 분열을 꾀하는 동시에 수십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매소성(경기도 양주)에서 당군을 격파했다.
신라는 여세를 몰아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당의 해군을 격파하고 삼국을 통일(676)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은 대동강 이남으로 한정됐다.
이후 대동강 이북에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발해가 건국돼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 시대를 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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