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12) '사이비 개혁' 조선 병역제도

입력 2004-03-17 09:01:04

*조선 병역제도의 모순

배고픈 것은 참아도 차별은 못참는다는 말이 있다.

그 차별이 가난하고 힘없기 때문이라면 이중의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것도 구조적인 것이라면.

조선의 군역제도가 그랬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원칙에 따라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두 군역의 의무를 졌으나 차차 이런 원칙이 무너져 내렸다.

양반들은 차차 군역에서 면제되어 갔던 것이다.

관아에서는 징병대상자들에게 당시 화폐처럼 사용되던 포(布)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이는 불법이었으나 관아에서 하는 것이므로 광범위하게 자행되다가 중종 36년(1541)에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 합법화되었다.

이제 돈만 있으면 합법적으로 군역에서 면제될 수 있게 된 것인데, 문제는 양반들은 아예 군포 징수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상민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군포를 납부해야 했지만 양반들이 제외되면서 군포 납부여부가 양반과 비양반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신성한 병역의 의무가 상민들의 천역(賤役)으로 전락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근본원인은 여기에 있다.

*나라에서 양반장사 나서

나라에서 재정부족을 이유로 양반 장사에 나서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조정에서 납속책(納粟策)과 공명첩(空名帖) 판매에 나선 것이다.

납속책은 곡식을 내면 역에서 면제시켜 주겠다는 것이고, 공명첩은 대상자의 이름을 빈칸으로 둔 관직임명장으로 곡식을 내면 이름을 써서 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호조에서 제정한 '납속사목(納粟事目)'에 따르면 '향리는 3석(石)이면 3년간 역을 면제하고…. 30석이면 향리의 역을 면제하여 참하(參下)의 영직(影職)을 제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향리의 경우 30석만 있으면 양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흉년이 들자 공명첩 2만장을 팔도에 팔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한 번에 수만장을 남발하기도 했다.

비록 실무는 없는 그림자 벼슬이지만 국가에서 인정하는 양반이 된 것이므로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이는 재력 있는 상민들은 합법적으로 양반이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급격히 증가한 양반숫자

이 때문에 조선 후기 양반 숫자는 급격히 증가했다.

대구지역의 경우 1690년(숙종 16년)만 해도 양반의 비율은 9.2%에 불과했고, 양민이 53.7%, 노비가 37.1%였는데, 약 100년 뒤인 1783년(정조 7년)에는 양반은 37.5%로 급증했고, 약 70년 뒤인 1858년(철종 9년)에는 양반이 70.3%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양민은 28.2%, 노비는 1.5%로 줄었다.

'모두가 양반의 후예'인 우리 사회의 특이한 현상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는데, 병역 면제라는 혜택을 받기 위해 기를 쓰고 양반이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면제분을 돈이 없어 납속책이나 공명첩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상민들이 메꿔야했다는 점이다.

가난한 것도 억울한데 이중 삼중의 부담까지 져야했던 것이다.

게다가 군사수가 급증하면서 상민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을 설치한데 이어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을 설치했고, 정묘호란 뒤에는 수어청을 설치하는 등 군영이 5개로 늘어난 것이다.

군사수는 늘어난 반면 부담자는 줄어드는 모순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불러왔다.

*군제개혁론과 그 반대들

과중한 부담을 못 견딘 백성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 요즘말로 군제개혁론이 등장했다.

영조 28년(1752)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에게 올린 상서는 이런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여섯 도(道)의 백성 134만 호 중에서 잔호(殘戶).독호(獨戶) 72만을 제하면 실호(實戶)는 겨우 62만입니다.

그런데 사부(士夫).향품(鄕品) 등 양역을 부과할 수 없는 자가 5분의 4나 되기 때문에 양역에 응하는 자는 단지 10여만 뿐입니다…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이때 논의된 해결책은 4가지였다.

군역 기피자를 색출해서 군역의 의무를 지우자는 유포론(遊布論), 대동법처럼 토지단위로 군역세를 매기자는 결포론(結布論), 신분을 따지지 말고 호(戶) 단위로 군포를 받자는 호포론(戶布論), 신분을 따지지 말고 모든 성인남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구전론(口錢論)이 그것이었다.

이중 모든 성인남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구전론은 양반들의 반대로 일찌감치 사라졌고, 결포론과 호포론이 중점적인 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왕구(王球)가 말한 "사대부와 서민의 구별은 국가의 헌법이다〔士庶之別 國之章也〕"라는 특권 의식에서 나온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으로 반대했다.

양반들이 어찌 상놈과 함께 천역을 지겠느냐는 것이었다.

*미봉책에 그친 대책

양반들의 반대가 거세자 숙종은 일부 군영을 폐지해 부담을 줄이려 했다.

숙종은 재위 28년(1702)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해 이를 논의했는데, 5개 군영 중 1개 군영을 철폐해 군사 수를 줄이려 했으나 국왕 경호상의 문제로 무산되고, 5군영에서 불요불급한 군사 3만7천여명을 줄이는 미봉책으로 귀결지어졌다.

역대 국왕 중에 군역폐 해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영조로 그는 재위 18년(1742)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설치해 군제개혁에 나섰다.

양반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구전론은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영조는 호포제와 결포제 중에서 하나를 실시하려 했다.

양반들의 반대가 심하자 영조는 재위 26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을 만나 군역의 고통을 직접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아! 오늘의 신민은 열성조께서 애휼(愛恤)하셨던 자들이다.

모든 부형(父兄)이 항상 아끼던 세간을 아들이나 아우에게 주면 아들과 아우된 자는 아끼고 보호하여 혹시 상할까 항상 걱정하는 것인데, 하물며 억조(億兆) 사서(士庶)를 어찌 아끼고 보호하는 세간에 비교하겠는가. 부르짖고 원망하여 바야흐로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영조실록" 26년 5월 19일)'

그러나 양반들은 국왕의 눈물에도 끄떡 않고 결포제와 호포제를 모두 반대했고 영조는 균역법(均役法)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균역법은 상민의 부담을 반으로 줄이는 대신 부족한 액수를 왕실과 지주들이 나누어지자는 타협안이었다.

상민들이 연간 2필씩 납부하던 군포를 1필로 줄이고 부족분은 결작미(結作米)와 어염선세(漁鹽船稅) 등으로 메꾸는 방안이었다.

결작미는 전지 1결당 쌀 2두(혹은 돈 2전)를 징수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양반들의 부담액이었다.

지주들이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어염선세는 과거 왕실의 수입이던 것을 정부 재정으로 돌린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 합리적인 방안 같지만 계산착오가 드러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균역법의 한계와 후유증

양반지주들은 결작미 2두를 슬그머니 전호(佃戶:소작농민)에게 부담 지웠다.

결국 농민들의 소작료만 늘어난 셈이었다.

게다가 정부가 감액했던 군사 숫자를 다시 늘리면서 상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이렇게 양반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만들어진 균역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켜 세도정치 시대 전국을 휩쓴 농민저항, 곧 민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당시 군제개혁은 양반들의 반대가 아무리 심해도 양반특권을 철폐하는 것으로 가야했다.

이는 신분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따르는 길이기도 했다.

19세기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대원군이 뒤늦게 호포법을 실시해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았으나 100년 이상 역사발전을 가로막았던 오류를 씻기에는 너무 늦었고, 조선은 일제의 침략에 변변한 군사적 대응 한번 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21세기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10년 이상 개혁타령을 하면서도 개혁이 여전히 화두인 것은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고 균역법처럼 개혁시늉만 냈기 때문이다.

개혁의 대상은 정치권만이 아니다.

500만명에 달한다는 비정규직은 우리가 당장 해결해야 할 현대판 상민들 아닌가. 대기업 노조가 회사측에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대판 양반들인 자신들의 양보를 전제하지 않는 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개혁이 필요한 곳이 어찌 비정규직 문제 뿐이겠는가. 앞길은 멀고 집단이기주의는 기승을 부리고, 그래서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정약용의 애절양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시론을 피력했던 다산 정약용의 절창 '애절양(哀絶陽)'은 군역의 참상을 읊은 시이다.

'갈밭 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관아 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통곡하네/ 징발당한 사내 못돌아옴은 일찍부터 있었건만/자고로 남절양(男絶陽:생식기를 자르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네/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떼지 못했건만/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구나'

이렇게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오르자 사내가 "아이 낳은 죄로구나"라며 생식기를 잘랐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권8, 첨정조에서 이에 대해 기술했다.

"이것은 가경(嘉慶) 계해년(1803) 가을 내가 강진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노전(蘆田)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라고 말했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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