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거기도 봄이 오려나

입력 2004-03-17 09:01:04

폭설이 내린후 봄이 성큼 우리앞에 찾아왔다.

얼마전 마냥 쏟아지는 눈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산과 도시를 가리고 내려앉은 하늘, 찬 바람 타고 눈이 몰려오는 쪽은 북이다.

거기도 눈이 오려나? 몇 백만 동포가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는 땅, 차마 앉아서 죽지 못하고 강 건너 찾아 간 땅, 난민 되어 헤매도는 만주 벌판이 그 너머다.

거기도 봄이 오려나?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따뜻한 봄이 온다는 것은 그 중에서도 축복이다.

밝은 봄이 오는 걸 알기에, 그 긴 겨울의 어두움을 참고 견뎌낼 수 있다.

가난하고 못났어도, 배고프고 고달파도, 어김없이 다시 오는 새봄의 희망이 있어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게 붙드니, 어찌 큰 축복이 아닐까. 그러나 그 언 땅에도 진정 봄이 오려나?

대한민국 정부가 오는 유엔 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할 방침이라고 한다.

지난해 4월에 이어 오는 3월 15일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유럽연합(EU) 주도로 북한에 대한 인권결의안이 다시 상정될 경우 또 다시 기권하기로 방침을 세웠다는 것이다.

결의안이 담을 내용은 탈북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시정, 외국인 납치 문제의 투명한 해결, 고문방지협약 가입 등이라고 한다.

기권한다는 것은 이런 내용을 적극적으로 외면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할까? 인권의 존엄은 시대와 체제를 초월하는 가치이다.

그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본질적 가치이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동족의 인권 문제를 먼 나라 남들이 거론하는 마당에 이를 외면하겠다니, 이러고도 이 정부가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가? 이러고도 민족주의를 팔고 자주의 나팔을 불 수 있는 것인가?

말이 많은 세상이다.

말이 많아도 않느니만 못한 말들이 많고, 말로서 더 말이 많은 세상이기도 하다.

지도자의 말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겠단다.

침묵을 금이라고 하지만, 거꾸로 욕이거나 죄일 수도 있다.

말이란 어떤 자리에서 무슨 연유로 했고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미와 추, 선과 악으로 갈린다.

무식해서 말에 분별이 없는 것이야 어찌하랴. 그러나 알고도 그리 한다면, 그것은 추요, 악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없거나 없어야 할 자리에 있어도 추하거나 악해진다.

멀쩡한 사람이 추악한 행동을 할 때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국회 청문회에서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한 증인들은 그 추악을 숨기기 위해 무지(無知)나 부지(不知)를 가장한다.

어쨌거나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피하고 해야 할 말을 삼키는 이유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부당한 이익이나 죄를 숨기기 위한 것이다.

아니면 협박을 받고 보복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기권하기로 한 이유라는 걸 들어 보면 기가 막히고 분해서 차라리 서러울 지경이다.

"북핵위기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정부 내 논의에서 내린 결론"이란다.

그렇다면 북한 동포와 탈북난민의 인권을 거론하고 납치와 고문 문제를 지적하지 않겠다는 것이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 아닌가? 그렇게 퍼다주고도 또 무슨 협박을 당했기에 그리도 겁을 집어 먹었나? 아니면 달리 말 못할 사정이 또 있나? 세상에 제일 못난 정부는 제 백성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 못하는 정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못난 정부는 제 백성을 학대하고 남 보는 앞에서 업신여기는 나라다.

우리는 그런 정부가 북에만 있는 줄 알았다.

포로가 없다고 우기다가 넘어오니까 딴말하고, 제 동포가 매 맞고 굶주리는 걸 방치하고, 이국에 유민으로 떠돌다 감옥이나 벌판에서 스러져 가게 버려두는 정부, 그 모든 것을 못 본체 하다가 남들이 떠드니 자리를 피해버리는 정부, 이런 정부가 이끄는 나라도 제대로 된 나라는 아니다.

나랏일을 떠맡은 이들이 침묵을 공모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 동포들은 당신들의 알량한 관심을 기다리면서 짐승처럼 언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굶주리고 억압받고 남의 나라를 떠돌다가 벌판이나 감옥에서 숨져가고 있다.

짐작이라도 해 봤는가? 피하고 말하지 않는 그 비겁한 행색에 남들이 뭐라 할지, 그 침묵의 죄가 얼마나 클지. 사사건건 심판관 노릇을 자임하던 그 많은 시민단체들은 다 어디로 갔나? 노벨평화상 받은 이는 어디 있고, 인권위원회 만들어 호들갑떨던 이들은 또 무얼 하나? 왜 말로 시끄럽던 이들이 북한 인권문제만 나오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가.

봄을 노래하지 못하고 호루라기를 부는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얼어붙은 겨울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나라의 관심을 기다리는 동포들 마음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봄노래를 부를 수 없다.

거기도 봄이 오려나?

유우익 서울대교수.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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