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부부-(2부.10)'신부부 외조'를 보는 '구부부'

입력 2004-03-09 09:18:04

내 남편은 왕족(王族)이다.

혈통이 그렇다지만, 집안에서 하는 행세가 더 그렇다.

비안 박씨(比安 朴氏)인 남편의 족보책을 뒤적여 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증손인 파사왕(破娑王)의 후손으로 기록돼 있으니 언필칭 왕족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신라가 망한 지, 박씨 왕의 집권이 소멸된 지 천년도 넘었는데 왕족이라니…. 남편의 행세는 참으로 가관이다.

입장이 궁색할 때마다 왕족타령이 더한 데다 요즘은 친구들까지 여기에 부화뇌동하고 나섰다.

"왕가의 혈통에다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내조를 잘 못한다"고 늘 핀잔이다.

그런 왕족이니 매일 아침 깨끗한 속옷에다 와이셔츠를 칼같이 다려서 대령을 해야 출근을 한다.

집안에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여름날 가족들과 야외에 나들이 가서도 그늘 밑에 앉아 근엄하게 부채질이나 하지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다.

요즘 남편들은 집안 청소며 설거지도 한 번씩은 거든다는데 내게는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그 뿐인가. 남편은 왕족답게 풍류를 좋아하고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그러니 자정이 넘어 새벽달이 뜨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다반사이다.

술취한 왕족이 바깥에서 혹여 옥체(?)를 다치거나 체통을 구기는 실수는 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창밖에 귀를 기울이며 잠을 설치는 아내의 속내를 도무지 헤아릴줄 모른다.

남편은 체격이 나보다 여윈 편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구해다 거안제미(擧案齊眉:밥상을 눈썹높이 만큼 받들어 들인다.

남편을 깎듯이 공경함을 뜻한다)를 해도 체중에 변함이 없다.

그러자 차라리 내 몸무게를 더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한번은 아주까리 기름이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서 그놈을 구해다 먹었다가 얼굴에 부기가 오르고 체중이 더 늘어나는 소동까지 빚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참기름이 섞인 식용유였다.

남편은 고교시절 유도 선생님과 맞붙었을 만큼 강단있는 유도 유단자였다며 은근히 겁을 준다.

또 학창시절 반 축구대표였을 만큼 운동신경도 남달랐다고 으스댄다.

나는 남편의 체격으로 보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친구들이 정색을 하고 인정을 하니 믿을 수밖에.

하긴 지난 겨울 도둑침입 소동 후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바람이 많이 불던 그날 새벽녘까지 책을 보던 남편이 아파트 뒷베란다에 도둑이 들었다며 선잠이 든 나를 깨웠다.

결국 옆동에 살던 남편의 친구가 맨발로 뛰어오고 경찰까지 출동하는 소동 끝에 그 도둑은 바람으로 판명됐지만, 급한 김에 다리미판을 들고 창문쪽 바람도둑과 팽팽하게 대치하던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 말이 빈말은 아닌 듯 싶어서다.

얼마전 몇달간의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뜬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긴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요사이 시나브로 가족과 삶에 대한 상념에 잠기곤 한다.

잘났건 못났건 다들 크고작은 아픔을 간직하고 사는 게 인생이 아닐까.

보다 젊은 시절에는 남편의 별난 행세가 밉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단 한가지 아무리 왕족이지만 건강을 위한 잔소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예쁘게 자라는 두 공주를 위해서라도 이젠 제발 술 좀 자제하고 운동하시길…. 왕족 남편을 받들고(?) 사는 아내의 소박한 바람이다.

전우혜(45.대구시 수성구 매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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