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10)신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입력 2004-03-03 09:23:16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지도력

모든 지도층은 존경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존경은 자기희생에서 생성되고 그렇게 생긴 권위에서 진정한 지도력이 나온다.

이런 지도층에게는 수하들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데, 김유신·김춘추로 대표되는 신라의 신주류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진덕여왕 즉위년(647) 10월 백제군이 무산·감물·동잠의 세 성을 포위하자 여왕은 김유신에게 보병 1만명을 주어 막게 했는데, 신라군은 백제 정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김유신은 전세를 뒤엎을 특단의 대책을 결심하고 비령자(丕寧子)를 불러 술 한 잔을 내렸다.

"세한(歲寒)이 된 뒤에야 송백이 가장 늦게까지 푸르름을 안다.

오늘 사세가 급하게 되었는데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분투함으로써 군중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비령자는 이 술잔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저를 뽑으셨으니 자신을 알아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는 홀몸이 아니었다.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을 데리고 출전한 상태였는데, 아들이 걱정된 그는 종 합절에게 일렀다.

"내 아들 거진은 나이는 어리지만 굳은 뜻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다.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가인(家人)들은 장차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내 유골을 가지고 돌아가서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말을 마친 비령자는 창을 비껴들고 백제 진영에 돌진해 여러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를 본 거진이 달려나가려 하자 합절이 "대인께서 집으로 돌아가 부인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을 저버리고 어머니의 자애를 버린다면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렸다.

거진은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사는 것이 어찌 효도겠느냐"라면서 나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합절은 "사천(私天)이 무너졌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무엇하겠느냐"라면서 역시 싸우다 죽었다.

이에 격동된 신라군은 앞다투어 돌진해 백제군을 격파하고 3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삼국사기' '비령자열전'은 전투가 끝난 후 "유신이 세 시신을 거두고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슬피 울며 통곡했다"라고 적고 있다.

김유신은 비령자가 아들과 종을 데리고 온 것을 알고 그를 선택했다.

신라군은 비령자 한 명의 죽음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 신주류의 자기희생

비령자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이 먼저 자기희생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자기희생에 대해 생생히 적고 있다.

'김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 못했는데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을 침범하자 왕이 유신에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 가서 이를 쳐 깨뜨려 2천명을 목 베었다.

유신은 3월에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가지 못했는데 또 백제가 내침한다는 급보가 있었다.

왕은 일이 급하므로 김유신에게 "나라의 존망이 공의 일신에 달렸으니 바라건대 수고를 어려워말고 가서 도모하기를 바란다"라고 명했다.

김유신은 또 집에 들르지 못하고 주야로 군사를 훈련시켜 서쪽으로 행군하는데 길이 바로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가 나와서 보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조')''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은 "이에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이 이렇게 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골육(骨肉:가족)을 떠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겠느냐'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 1년(661) 겨울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에서 고립되자 신라에 식량공급을 요청했다.

경주에서 수만명분의 식량을 갖고 고구려 진영을 돌파해 평양성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에 김유신은 "오늘은 곧 노신(老臣)이 절개를 다하는 날"이라며 이 임무를 자청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예순 다섯이었다.

그는 이 불가능한 임무를 성공시켰다.

김춘추도 마찬가지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에서 되레 옥에 갇혔다가 겨우 빠져나온 후 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일본서기' '효덕천황 3년(647)조'는 "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 김춘추 등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춘추를 인질로 삼았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때의 병력동원도 실패했다.

김춘추는 이듬해(648)에 아들 문왕(文王)까지 데리고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서안)으로 가서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뱃길은 서해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서해안을 끼고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면 해안으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김춘추가 귀국 뱃길에서 고구려 순라선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 종자 온군해(溫君解)가 김춘추의 갓과 의복을 입고 위장하는 동안 김춘추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온군해는 고구려군에게 죽고 말았는데, 이 역시 신라 최고지도층의 자기희생에 감동해 자청한 죽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요구

김유신과 김춘추는 삼국통일이라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실천에 온몸을 던졌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같은 헌신을 요구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위 김흠운(金歆運)은 내물왕의 8세손이기도 했는데, 태종무열왕 2년(655)에 백제의 양산(陽山)을 공격하다가 매복에 걸렸다.

그가 백제군과 맞서싸우려 하자 주위에서 "공은 신라의 귀골(貴骨)이요 대왕의 사위시니 만일 적인(敵人)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에게는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며 만류했으나 듣지않고 수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보기당주 보용나(寶用那)는 "그는 귀골이고 권세가 커서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는데도 절개를 지켜 죽었는데, 하물며 나같이 살아도 이익됨이 없고 죽어도 손해됨이 없음에 있어서랴"라며 돌진해 여러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도 마찬가지였다.

660년의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4번 패하자 김흠순은 셋째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신하에게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에게는 효도가 제일인데, 지금은 충과 효를 모두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반굴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백제진영으로 돌진해 싸우다가 죽었다.

이를 본 좌장군 품일(品日)은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같은 희생을 요구했고, 두 장군 아들의 희생은 전세를 뒤집었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의 경우는 신라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원술은 문무왕 12년(672)의 백수성 전투에서 당군에게 패하고 살아남았다.

보좌하던 담릉(淡凌)이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는 자리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며 만류하는 바람에 죽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뿐만 아니라 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요청했다.

문무왕이 "일개 비장인 원술에게만 중형을 시행할 수 는 없다"라고 거부해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가족에게 버림 받았다.

이듬해 김유신이 사망하자 그 어머니는 "선군(先君)에게 아들 노릇을 못했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머니가 되겠느냐"라면서 문상도 거절했다.

원술은 통곡하며 태백산으로 들어갔다가 문무왕 15년(675)의 매초성 회전 때 당나라를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평생 벼슬하지 않고 생애를 마쳤다.

이런 신주류 세력이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도층이란 용어가 아까울 정도로 그들은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신문과 방송은 아이들이 볼까 두려워해야 할 정도로 연일 이들의 부정으로 도배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리더는 없는 반면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전략만이 가득하다.

이런 리더가 득실대는 세상의 서민생활이 어찌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2004년도 공직자 재산변동 사항에 따르면 이런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행정부 1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75.2%가 재산을 불렸다니 그 혼란과 고통은 서민들만의 것이었던 셈이다.

그중 1년 사이에 무려 30억원 이상이 증가한 경우가 두 명이나 되고, 재산 증가 순위 20위가 2억8천만원이나 된다니 비록 뇌물로 불린 재산은 아닐지라도 '살기 힘들어 죽겠다'는 신음소리는 서민나라 이야기였을 뿐이고 그들은 딴나라 사람이었던 셈이다.

태종무열왕의 사위 김흠운은 낭당(郎幢)대감으로 출전하게 되자 "집에서 자지도 않고 바람으로 빗질하고 비로 목욕하면서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고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은 전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에서 존경할만한 이런 사회지도층을 갖게 될 것인가.

역사평론가 이덕일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