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9)-신라의 삼국통일

입력 2004-02-25 09:18:53

*김유신이 김춘추를 선택한 이유

개혁의 첫 단계는 어젠다(agenda),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존의 가치를 뛰어넘는 어젠다를 제시해야 고통을 감내하는 개혁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어젠다가 올바르면 그 실현 과정 자체가 개혁이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통해 어젠다의 중요성을 살펴보자.

7세기 초만 해도 한반도 동남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소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주대륙을 아우르는 북방의 패자 고구려와 왜국(倭國)을 휘하에 둔 해양강국 백제를 신라가 꺾을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했다.

그런 두 강대국이 연합을 결성해 공격해온 7세기 초 신라는 개국 이래 최대 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도 서라벌 진골들은 향락에 젖어 있거나 권력다툼만 일삼았다.

젊은 시절의 김춘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임신시켜 놓고도 모른 체 할 정도로 무책임한 인물이었다.

당초 김유신이 축구를 명분으로 김춘추를 끌어들인 것은 진지왕의 손자라는 그의 혈통을 사기 위해서였다.

진지왕이 황음하다는 이유로 폐출되는 바람에 김춘추도 왕위계승에서 멀어졌지만 왕실혈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결합해 가야계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신라 주류사회로 편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는 부인 보량궁주와 딸 고타소가 있다는 이유로 임신한 문희를 외면했다.

이에 분개한 김유신이 문희의 화형식이라는 전대미문의 도박으로 문희를 데려가게 했지만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는 물론 신라마저도 버렸다.

김춘추가 큰 꿈을 지닌 잠룡(潛龍)이 아니라 향락만 추구하는 토룡(土龍:지렁이)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삼국사기'에 웬만한 국왕의 본기(本紀)보다 몇 십 배 자세한 '김유신 열전'에 35세 때인 진평왕 51년(629)부터 48세 때인 선덕여왕 11년(642)까지의 행적이 누락되어 있는 빈공간은 춘추에게 실망한 유신이 신라를 버린 기간이다.

*김춘추의 대변신과 새로운 어젠다

그런데 선덕여왕 11년(642), 의자왕이 보낸 백제군의 공격으로 대야성(합천) 성주 김품석과 그 부인 고타소(김춘추의 딸)가 전사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비보를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종일 눈도 깜작이지 않고 사람이 눈앞으로 지나가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가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하나 삼키지 못하랴"라고 선언하면서 다른 인물이 되었다.

그는 딸 부부의 죽음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라 전체의 문제라고 자각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한 어젠다가 백제정복이었다.

그러나 서라벌 진골귀족들은 이를 꿈으로 여겼다.

김춘추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신주류를 형성해야 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에게는 춘추를 끌어들여 문희와 맺게 해주는 계략과 화형식을 서슴지 않는 승부사의 기질과 목숨 걸고 따르는 가야계가 있었다.

고구려 사신길을 자청한 김춘추가 김유신을 찾아가 "내가 고구려에 들어갔다가 해를 당한다면 공은 무심할 것인가"라고 물은 것은 과거사에 대한 사과였다.

김유신의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라는 말은 사과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는 김춘추의 혈통과 가야계 군신(軍神) 김유신의 결합이었다.

백제를 칠 군사를 빌리러 고구려에 갔다가 실패한 김춘추는 이에 실망하는 대신 더 큰 어젠다를 제시했다.

바로 '삼국통일'이라는 어젠다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지배체제로 삼국통일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김유신을 제외한 서라벌 진골들의 어젠다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내부권력 쟁취였다.

따라서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가장 시급한 개혁은 이런 정치지형을 바꾸는 것이었다.

647년(선덕여왕 16년:진덕여왕 1년) 상대등 출신의 이찬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이 이런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당 태종의 여왕비하 발언 소식이 전해지자 "여왕은 정사를 잘하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진골귀족 대부분이 여기에 가담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세불리했다.

게다가 김유신 군사가 주둔한 월성에 별이 떨어졌는데, '삼국사기'는 별이 떨어진 곳은 피를 흘린다는 속설 때문에, '비담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땅을 진동했고, 여왕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어젠다에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고 확신한 김유신과 춘추는 흔들리지 않았다.

김유신은 한밤중에 불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올린 후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고 소문내 인심을 수습하는 한편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 하늘을 위로하고 비담이 진주한 명활성으로 진격했다.

비담의 반군을 격파함으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주류로 부상했다.

김춘추는 이 여세를 몰아 진덕여왕 1년(647) 왜국(倭國:일본)으로 건너가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이듬해에는 당나라로 향했다.

아들 문왕(文王)을 인질로 남기겠다는 김춘추의 배수진은 3년 전 고구려 침공 실패로 상심한 당 태종의 마음을 움직여 드디어 나당동맹이 결성되었다.

김춘추는 당 태종과 삼국통일 후 백제 영토 전부와 대동강 이남을 갖기로 합의했다.

*어젠다의 실천

나당동맹 결성은 삼국통일이란 어젠다를 실현가능한 목표로 만들었다.

김춘추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내부정비에 착수했다.

신라의 국가체제를 국제기준에 맞추는 개혁을 단행하기로 한 것이다.

진덕여왕 2년(648) 신라의 관복을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그 2년 후 신라의 독자적 연호를 버리고 영휘(永徽)라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신라의 고유한 독자성을 일부 버리고 동맹의 기준에 맞춘 것이었다.

김춘추는 신라의 독자성 유지보다 나당동맹을 강화해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바꾸는 등 행정체계를 개편한 것도 삼국통일을 뒷받침할 수 있는 행정체제로의 개혁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라벌 진골들은 이런 조치에 불만을 가졌다.

진덕여왕 사후 군신들이 이찬 알천(閼川)을 국왕으로 추대한 것은 이런 불만의 표현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알천 체제로는 삼국통일을 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 체제로는 왕족이 백주에 전사하는 현실을 타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둘은 왕위 쟁취에 나섰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는 알천이 "나는 늙고 덕망도 없으나 춘추공은 덕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할 영웅이다"라고 사양해서 김춘추가 국왕이 되었다고 적고 있으나 같은 책 '김유신 열전'조에 '진덕여왕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자 김유신이 재상 알천과 의논해 춘추 이찬을 맞아 즉위케 했다'고 적고 있는 대로 이는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무력시위의 결과였다.

이로써 김춘추는 왕위를 차지했으나 아직 왕권은 강고하지 못했다.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라는 약점에다 성골 아닌 진골출신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게다가 여타 진골들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즉위 당시 김춘추의 나이는 이미 53세였으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일단 구세력과 타협하면서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재위 2년 정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으면서 장자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한 것은 이런 타협의 산물이었다.

재위 7년(660) 정월 금강이 사망하자 비로소 그 자리에 김유신을 임명했다.

비로소 국왕 김춘추-상대등 김유신 체제가 수립된 것이었다.

김춘추-김유신 체제의 목적은 권력장악이 아니었다.

그들이 멀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장악한 이유는 '삼국통일'이라는 어젠다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그해 3월 신라는 백제 정벌에 나섰고 나당연합군의 단 한번의 공세에 백제는 무너졌다.

김춘추는 비로소 고타소가 전사한 지 18년 만에 '백제 하나 삼키지 못하랴'라는 어젠다를 실현할 수 있었다.

18년 전만 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춘추는 비록 백제멸망 이듬해 사망했으나 그는 생전에 어젠다를 계속 실현할 수 있는 후계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그 아들 문무왕은 이런 시스템을 계승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그리고 나당전쟁으로 당초 약속을 어기고 영토에 욕심을 내는 당나라를 강제로 축출했다.

이 시기 신라인들이 일종의 영적(靈的) 폭발상태에서 삼국통일이라는 어젠다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동안 백제는 의자왕의 정치개혁 실패로,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내부 분열로 어지러웠다.

강대국의 몰락이나 약소국의 부흥은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 개혁의 가장 큰 문제는 어젠다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개혁에서 어젠다가 상실되면 남는 것은 고통뿐이다.

우리는 왜 10여년 이상 고통스런 개혁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가. 이 터널의 끝은 과연 삼국통일같은 비상인가 아니면 후진국으로의 추락인가.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개혁론자는 김춘추.김유신같은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과연 우리 곁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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