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의 경우 어떤 선거이든 돈이 없으면 치를 수가 없었다.
국민적인 관심을 끈 선거구라면 유력 후보는 소속을 불문하고 수십억원에서 100억원 정도의 돈을 퍼부었다는 것이 80~90년대 정치권에 관여한 인사들의 증언이다.
15대 총선 당시 한 무소속 후보의 선거자금 집행에 관여한 ㅇ모씨는 "언론에 알려진 규모의 5~10배 정도 썼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라며 "50억원 이상 돈을 쓰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고 했다.
▲90년 대구서갑 보선과 93년 대구동을 보선
'TK목장의 대결투'로 불린 90년 대구 서갑 보선이나 선거 당일 저녁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가 있었던 93년 대구 동을 보선은 여권이 전력을 투구했던 선거인 만큼 엄청난 돈이 투하됐다고 한다.
또 공조직을 통해서 현찰을 돌리는 '봉투작업'을 하는데만 1회 최소 10억원 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민자당은 이 조직에 선거운동기간 동안 2, 3 차례의 봉투작업을 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이 줄잡아 40~50억원. 전체 선거비용은 세 자리수를 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전국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만큼 서울과 지역의 내로라하는 기업체 대표나 유지들이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성의'를 표시했다는 점에서 더이상 쓸 수가 없었을 뿐이지 돈이 없어서 못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 당시 선거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16대 총선의 한 비 한나라당 후보
한나라당이 싹쓸이했던 16대 총선에서 여기에 맞섰던 후보들이 퍼부은 돈도 많았다.
결과는 물론 낙선. 이 후보는 선거운동기간중 봉투작업을 한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차례에 10억원 이상이 들었는데 안 될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돌고 참모들도 만류, 중단했다는 것. 그런데도 그 후보는 40억원 이상의 돈을 썼다고 했다.
이 후보의 한 핵심참모는 "상대방 후보도 우리 만큼은 안되더라도 국민들이 생각하는 수준보다는 훨씬 더 많은 돈을 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7대 총선 개선의 조짐
돈 받은 사실을 신고하면 그 액수의 100배, 최고 5천만원까지 포상하고 선거사범을 단속한 경찰관에게는 최고 1계급 특진이라는 특전도 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다.
또 유권자에 대해서도 제공받은 금액의 50배에 달하는 과태료를 부과토록 한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곳곳에서 돈선거를 근절하려는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머리수=돈'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던 합동연설회와 정당연설회 그리고 '돈먹는 하마'라는 지적을 받아온 지구당의 전면 폐지를 명문화 한 새 정치관계법은 정치개혁의 측면에서 분명한 진일보다.
선관위의 단속.선거관리 의지도 달라졌다.
경북도선관위 최상철(崔相哲) 홍보과장은 "올해는 무엇보다 돈선거의 근원을 뿌리뽑는데 주력할 것"이라며 "이미 선관위는 선거자금이 만들어지고 어떤 경로로 불법 자금이 전해지는지 그 방법과 경로에 대해 자치단체별로 20명 안팎의 '비공개' 정보수집요원을 투입해 정보를 수집하고 감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 과장의 "선거 범죄는 조직범죄"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경찰쪽도 강경 분위기는 못하지 않다.
대구시경 관계자는 "경찰 전체의 단속 의지가 확연하게 다르다.
한 건 하겠다는 의지도 매우 강하다"며 "선거사범 단속에 대한 교육 강도도 전과 다르며 내부 분위기 역시 많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는 선거법 위반으로 보궐선거를 치러야 할 곳이 수십곳에서 많게는 100군데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후보들만 긴장하는게 아니다.
'선거꾼'들도 몸이 움츠려들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 역시 '일단 먹고보자'는 의식 수준은 한참 뛰어넘은 것 같다.
표면적인 선거분위기는 극도로 차분하다.
과거와 비교하면 얼어붙었다고 할 정도다.
돈 안쓰는 선거, 돈 못쓰는 선거, 돈 안드는 선거 분위기 조성에는 일단 성공한 것 같다.
▲돈선거 정말 근절되나
법과 제도가 정비됐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돈선거의 깊은 뿌리가 제거됐다고 생각하면 속단이자 착각이라는 것이 소위 '선거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역 정가에서 선거에 관한 한 '프로'로 손꼽히는 ㅂ씨는 돈선거에 대한 전망과 관련, "전반적인 선거 분위기는 분명히 개선될 것이고 손 벌리는 아마추어 선거꾼들은 행동이 위축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진짜 돈선거의 원흉인 '조직' 선거 행태는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며 극소수의 후보들은 오히려 돈에 더 의존할 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그는 "과거처럼 조직 선거에 의존, 돈을 물쓰듯 내려보내던 후보의 숫자는 분명히 줄어들 것"이라면서도 "선거 구도가 빡빡할수록 전통적 개념의 조직에 의존, 돈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ㅂ씨는 이어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선거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면서도 돈을 써야 한다는 유혹에 노출되고 또 돈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선거판의 현실"이라고 고발했다.
또다른 전문가 ㅇ씨는 "사람들은 정당연설회나 합동유세 등을 돈선거의 표본이라고 생각하지만 비중이 작은 편"이라며 "실제로는 동책부터 투표소 책임자, 통책, 반책으로 내려오는 조직에 들어가는 돈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돈선거의 주역에는 각종 단체나 조직, 모임 등도 포함된다.
ㅇ씨에 따르면 결속력이 강한 조직일수록 '처방'은 고단위가 될 수밖에 없고 단속이 강화되는 바람에 '위험수당'까지 포함돼 돈이 더 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돈선거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기는 하겠지만 '선수'들을 동원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진짜 돈선거는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동관기자 llddkk@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김정숙 소환 왜 안 했나" 묻자... 경찰의 답은
"악수도 안 하겠다"던 정청래, 국힘 전대에 '축하난' 눈길
李대통령 지지율 2주 만에 8%p 하락…'특별사면' 부정평가 54%
국회 법사위원장 6선 추미애 선출…"사법개혁 완수"
李대통령 "위안부 합의 뒤집으면 안 돼…일본 매우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