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크림트의 화집을 샀다.
회화라기보다는 디자인에 가까운 그림의 외형, 반복되는 색상이 눈에 거슬렸음에도 화집을 손에 들고 서점을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연히 펼쳐든 페이지의 그림에 두 남녀가 짙은 포옹을 하고 있었는데 제목이 '전 세계를 위한 키스'였다.
그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 인류를 위한 키스로 읽혀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게 전 인류를 위한 사랑의 의미로 해석되었으며 어떤 입맞춤이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입맞춤일까를 생각하는 동안 실실 웃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림의 부제는 더 인상적이었다.
행복에 대한 염원은 시를 통해 이루어진다…시를 써서 밥을 먹고사는 시쟁이의 눈에 이 부제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었다.
제목과 부제가 마음에 들다보니 그림 전체에 깔린 디자인적 요소들과 일견 천박하게 느껴지던 노란색의 변주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보기 드문 화가였다.
자신에게 특별한 점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은 귄터그라스가 노벨상 수상 연설을 하며 나는 천재가 아니라 단지 내 노동력에 의거하여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와 일치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그의 발언이 어떤 천재의 영감에 찬 발언보다 질박하게 가슴에 닿아왔다.
결함과 상투성으로 보이던 그의 그림의 디자인적 요소들이 문득 기존의 고상한 예술체계에 대한 도전이란 생각이 찾아왔고 그 순간 그의 그림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가능해졌다.
사실 디자인적인 요소는 그의 그림에서만 존재하는 양식은 아니다.
렘브란트나 고호의 그림이 그렇고,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그림이 다 그렇다.
지극히 디자인적인 속성이 강한 것이다.
강렬한 디자인이 예술가의 고뇌에 찬 열정과 맞물려 떨어질 때 비로소 한 천재의 작품이 피어나는 것이다.
바하나 베토벤의 음악 또한 디자인이 강렬하긴 마찬가지다.
운명의 지난함과 영혼의 고결함이 담긴 음률의 디자인 속에서 우리는 생의 영감과 위로를 얻는다.
예술의 역사는 디자인의 역사를 가슴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의 역사로 치자면 2004년 대한민국은 내세워도 좋을 얘깃거리 하나를 지녔다.
자동차 번호판의 디자인이 그것이다.
새로 바뀐 자동차 번호판의 외형에 대해 항의가 봇물처럼 터진 것은 그 번호판의 형상을 바라본 이라면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라는 글자와 그림이 새겨진 색색의 번호판을 단 미국의 자동차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거니와 우리의 바뀐 자동차 번호판은 전 국민을 암묵적인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한 것이었다.
녹색(국방색) 바탕에 숫자만 횡하니 키운 번호판의 모습은 지나간 시절의 권위주의와 반공이데올로기와도 연관된 것이었다.
놀라운 일은 우리의 관료들이 잘못된 디자인을 인정하고 번호판을 다시 고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미 투입된 수 십 억 원의 예산을 이야기하며 졸속행정을 비판할 것이다.
졸속행정이 어디 그뿐일 것인가. 핵폐기장 설치, 새만금 간척사업, 고속전철 선로의 변경 등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는 국책사업들도 졸속을 답습한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새 길을 모색한 것은 역사에 없던 일이다.
디자인에 대해 한 가지 제안하자. 대한민국 여권의 디자인이 바로 그것이다.
외국여행의 이력이 깊은 이라면 우리나라 여권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미국여권을 들고 갈 수 없는 나라들도 우리나라 여권은 자유롭다.
미국과 북한만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여권은 세계 어느 나라든 출입이 가능한 것이다.
자동차 번호판처럼 국방색 바탕에 대한민국이라 새겨진 우리 여권의 딱딱한 형상 또한 지난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들의 여권 디자인은 가히 예술품 수준이다.
세계 10위의 무역대국, 우리 여권의 얼굴을 세련되고 화사하게 바꿀 관료들은 어디 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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