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도)의 기생으로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그의 생존 연대는 그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를 통해 추측할 뿐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520년대에 태어나서 1560년대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진이의 어머니 진현금은 아전의 딸로 맹인이었으며 미인은 아니었다.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좋아해 황진이를 낳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었다.
황진이는 자라면서 거침없는 성격과 미모로 두각을 나타냈다.
'상여일화'는 그의 미모를 알려주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황진이가 15세 되던 해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집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해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다.
황진이가 치마를 벗어 관을 덮고 슬프게 곡을 하고 나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그는 이후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살기를 원치 않았다.
봉건적 윤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다.
자유로운 삶, 당시로서는 기생의 길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황진이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올랐다.
그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로라 하는 풍류객들이 황진이를 보기 위해 송도로 몰려들었다.
당시 송도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다.
화담 서경덕과 지족암에서 30년 동안 면벽 참선한 지족선사였다.
황진이는 평소 두 사람을 흠모했다.
그는 먼저 화담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했다.
선생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승낙했다.
어느 날 황진이는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했다.
선생은 또 허락했다.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과 한방에서 동거하면서 그를 유혹하려 했다.
그러나 화담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후 황진이는 화담을 참 스승으로 모시고 오랫동안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 공부했다.
황진이는 또 지족선사를 유혹했다.
생불이라고 불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황진이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했으나 지족선사는 거절했다.
며칠 후 그는 청춘과부의 복색으로 다시 지족암을 찾았다.
선사의 옆방에 침소를 정하고 죽은 남편을 위해 백일간 불공을 올린다며 밤마다 불공을 올렸다.
직접 축원문을 지어 청아한 목소리로 읽었다.
천사의 노래와 같았고 선녀의 음률과 같았다.
지족선사는 처음에는 무심히 들었으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했다.
30년 동안 옆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떠서 황진이를 보았다.
결국 황진이의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은 선사를 파계하게끔 했다
황진이는 상사병에 걸려 죽은 동네총각부터 송도유수 송화영, 김참판, 김참판의 아들 김지학, 소세양, 벽계수, 이언방, 이사종, 지족선사 등 여러 남자를 사귀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 존경하고 사모한 사람은 스승인 화담 서경덕이었다.
서경덕이 죽은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 등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마흔쯤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죽을 때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고적한 산중에다 묻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가에 묻어달라.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했다.
장사 지낼 때에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울려 달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의 큰길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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