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착한 후배

입력 2004-02-05 09:20:32

아끼는 여자 후배가 한 명 있다.

요즘 보이지 않아 전화를 했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다.

또 감기예요, 한다.

노처녀. 그만하면 이제 시시한 녀석들 정강이는 쉽게 걷어 찰 만한데 여전히 약해빠졌다.

때때로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은, 그의 일상에서 보다 작고 특별한 계기에서 더 강하게 남는 것 같다.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였다

자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더듬거리던 나는 타자 솜씨를 늘려보기 위해 채팅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하지만 채팅을 통해 대화를 하는 나는 내가 아니라 채팅을 하는 동안에만 살아있는 가상의 나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 가상의 공간을 통해 만나는 상대들 역시 그러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거짓게임' 같았다.

그 후배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정색을 하며, 선배님, 그러지 마세요, 컴퓨터속의 세상도 현실과 같아요, 자신을 감출 수는 있지만, 그러면 더 외로워지는 건 선배님 자신일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신은 아이디를 '진실함'으로 정했고 통신을 통해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또 부팅할 때면 "안녕, 잘 잤니? 그래 우리 오늘도 잘 해보자"하고 인사하면 컴퓨터도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시엔 참 인상적인 충고여서 그 후 나 역시 채팅을 통해 좋은 정서적 동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배는 이런 얘기도 했다.

언젠가 여행길에서 차가 덜컹거리길래, 그래 너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조금만 더 힘내, 했더니 여행이 끝날 때까지 참 잘 달려주더라고.

말 안 들으면 발로 걷어차고만 싶은 기계에게조차 다정한 그녀에게는 가상공간의 친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착하고 여린 후배다.

서정호(베이프로모션 대표)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