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전 11시 13분. 신비한 안개가 크게 사라지면서 사위가 훤히 드러나는 능선에 올라섰다. 속리산 문장대가 바로 코앞에서 버티고 있고 뒤쪽 재 너머에는 장엄하고 웅장한 산악들이 첩첩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좌, 우에는 움푹 패어 있었고 인가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나아가는 곳으로는 계속 바위능선을 타야하는 기세다.
본격 암릉. 국립공원이 마련한 밧줄도 타기도 하고 팀이 준비한 밧줄을 새로 걸어 매달리기도 타고 내려오기도 하면서 전진을 거듭했다. 눈이 얼어 도처에 빙판길도 있는데다 바위산을 넘고 헤치고 뚫고, 가는 길도 험하고 미끄럽기 짝이 없어 느리게 느리게 계속 치고 올라갔다. 암릉 사이를 겨우 겨우 지나오고 몸 하나만 간신히 들어가는 개구멍도 있고 모처럼 '군 특공대 산악훈련'의 묘미도 만끽했다.
아들이 암릉을 타고 내릴 때 나에게 손을 잡아주어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움을 받다니 "아, 이 무슨 부끄러운 일인가". 제 왼팔이 약간 이상이 있어서 밧줄 잡는 게 영 시원찮았죠.
속리산은 지리산이나 설악산과 같이 넓은 땅을 차지하는 큰 산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험준한 암릉과 암봉우리, 탑처럼 쌓아올린 듯한 기암괴석으로 구성된 완전 '돌산'이더라구요. 한마디로 '미인의 고운 자태'를 보는 듯하더라구요. '암릉미인' (巖稜美人)이라고나 할까.
멀리서 보면 흰 뼈처럼 된 화강암들은 눈을 통째로 덮어서는 바람에 역시 흰 뼈로 보였다. 산에서도 흰 뼈가 멋있네. 그래서 속세에 내려오면 설렁탕집과 감자탕집이 난립하나.
속리산은 돌산. 돌삐산. 사람보고 '돌' 이라고 하면 머리 나뿐 둔재를 일컫지만 산을 보고 '돌산'이라고 하면 경치 뛰어난 멋진 산을 일컫는다. 우째 이렇게 다르나. 기암괴석이 천지삐까라인 속리산.
'멋진 바위'가 열병식을 펼치고 있는 게 장관이다. 자연, 유치환 '바위'가 생각나네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흐르는 구름/먼 원뢰(遠雷)/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를 잘 정리했구만. 바위를 갖고 다른 사람이 시를 지어도 이 안에서 놀겠구만. 하여튼 먼저 찜 잘 하는 분이 최고지 뭐.
조선말 한국의 대표적 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 에도 속리산에 대해 이처럼 소개를 했더라구요.
" 백두산에서 태백산까지는 한 줄기의 영으로 통하여 좌우에 다른 봉우리가 없다. 소백산 아래부터는 맥이 자주 끊어지는데 끊어져서 된 산으로는 속리산이 처음이다. 감여가는 속리산을 돌 火星이라 한다. 그러나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위리의 뾰족한 돌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 마치 처음 피는 연꽃 같고 또한 불을 멀리 벌려 세운 것 같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곳이 깊게 감싸고 돌아 여덟 굽이 아홉 돌림이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로 된데다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이다.
온산을 빙 들러 기이한 골짜기와 별난 구렁이 많고 그윽한 샘과 기묘한 돌이 묘하고 아늑한 형상으로 금강간 사듬간다. 속리산 남쪽에 있는 환적대는 천 봉우리 만 구렁이 깍아지른 듯 깊숙하여 사람이 들어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이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작은 냇물이 되어 들을 지나고 청화산 남쪽을 따라 동쪼긍로 용추에 흘러드는데 이것이 병천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속리산 정상에서는 인가에 가깝더라구요. 지리산과 설악산과 금강산은 속세와 떨어져 있더라구요. 속리산은 역시 속세와 떨어지고 싶지만 멀리 떨어지지 못한,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한 것 같아요. 이런 말이 생각나요. 인생은 고(苦) 다. 명산도 고고 모든 만물은 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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