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갱이-조선의 '신여성' 나혜석

입력 2004-01-30 09:32:43

나혜석(羅蕙錫:1896∼1948.사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다.

서울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1914년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최초의 글을 발표, 근대적 여권을 주장했다.

1918년 학교를 마치고 귀국, 서울 정신여학교미술교사 생활을 했다.

교사 생활 중 3.1운동에 참가했고 체포돼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경도제대 법과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여성 최초의 유화개인전을 개최했고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했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해 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문예지 '폐허'의 창간동인이었다.

1923년 남편이 만주의 부영사로 임명돼 만주로 이주했다.

그 후에도 개인전을 여는 등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다.

1927년부터 3년 동안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시작했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은 조선인에겐 소문으로나 듣던 땅이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청년 장택상을 조선총독이 마중 나갔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나혜석은 선택받은 신데렐라였다.

파리에서 8개월 간 체류하면서 미술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해 수원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여권신장과 자유 연애론 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1932년 세계 일주 기행문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대중지 '삼천리'에 연재했다.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나혜석은 미술의 새로운 기운과 여성의 실존을 맛보았다.

그런 한편 귀국하면 어머니와 아내의 위치에 묻히고 말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아쉬워했다.

남편 김우영이 귀국하고 혼자 파리에 남은 나혜석은 1년 동안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화가로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중추원 참의 출신에 언론사 사장을 지낸 당대의 명사 최린과 염문을 뿌리면서 그녀의 운명은 바뀐다.

이 사건으로 이혼 당한 나혜석은 '삼천리'에 유명한 '이혼백서'를 쓴다.

'왜 여자에게만 정조가 강요돼야 하느냐'고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항거한 것이다.

그는 이혼과 함께 사회적 지탄을 온몸으로 받으며 재기를 준비했다.

100여 점의 작품을 준비했다.

그러나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녀는 급격히 황폐해갔고 붓을 놓은 채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1937년부터 10년 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산사와 양로원을 떠돌던 나혜석은 육신의 마비와 함께 정신분열증세를 보였다.

크고 아름답던 눈은 피로에 찌들어 총기를 잃었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손을 심하게 떨었다.

용산의 시립자제원(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 병자로 생을 마쳤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했던 나혜석, 눈부신 봄날 태어나 화려한 여름과 황량한 가을을 보내고 겨울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의 화풍은 시기별로 다르다.

동경유학 후부터 세계일주 이전까지(1918∼1926)는 아카데미즘과 인상파가 절충된 화풍을 보인다.

일본에서 공부한 영향이었다.

세계일주 및 유럽체류시기(1927~1929) 작품은 인상파 화풍 위에 야수파 화풍과 입체파 화풍이 함께 나타난다.

귀국이후의 작품(1930~1935)은 인상파 화풍의 작품과 파리시절의 스케치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 보인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