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지-개천에서 용 안 나는 시대

입력 2004-01-30 09:32:43

최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발표한 입학생 분석이 교육계에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분석결과의 핵심은 부유층일수록, 대도시 고소득 직군의 대졸 학부모 자녀일수록 서울대 합격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그만큼 원인 분석도 다양하게 쏟아진다.

일부 언론은 평준화가 주범인 양 몰아가고 있고, 이를 맞받아치는 목소리도 높다.

28일 사회과학연구원이 개최한 심포지엄에서도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문득 4년 전 취재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낡은 취재수첩을 펼쳐보니 2000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대구 한 고교 수험생들의 부모 직업과 학력, 주거형태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의 조사 결과도 서울대의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대 합격생 30명 가운데 아버지가 대졸 이상인 학생이 17명, 부모 모두 대졸 이상인 학생도 10명이나 됐다.

아버지 직업은 공무원 6명, 회사원 7명 외에 식당이나 주유소 경영, 약사, 개인택시 등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식당이나 건물 소유주도 눈에 띄었다.

가정 형편으로 보면 20명 정도는 자녀 공부에 투자할 여력이 충분하며 집안이 어렵다고 할 만한 학생은 2, 3명 뿐이었다.

결론은 가정형편과 부모 학력이 자녀의 학교 성적과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점차 듣기 힘들어지고 있다.

수능시험이든 대학별 전형이든 수석을 차지한 학생들을 보면 부모가 고위공무원, 변호사, 의사 등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까지 써 내며 인간승리의 대표적 사례로 꼽혀온 장승수씨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됐다.

막노동까지 해야 할 가정형편 속에서 지난 96년 서울대 인문계 수석합격의 영광을 안고, 다시 사법고시에까지 합격한 사실은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 된 것이다.

왜 이런 현실이 빚어지는 것일까. 일부 언론의 지적처럼 고교 평준화를 주범으로 보기는 어렵다.

서울대 분석에서 평준화 이전인 70년대 초반의 서울 출신 입학생 비율이 60%대로 가장 높았던 사실만 봐도 그렇다.

문제는 공교육의 파행과 사교육의 득세다.

고교 평준화에 대한 불만도 결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초등학생 단계에서부터 학교는 이미 교육의 주도권을 잃고 있다.

학원에서 먼저 배우고, 학원에서 더 배우는 현실이 일반화됐다.

대구 수성구의 일부 초등학생들은 과외비로 월 500만원 이상씩 들인다는 얘기도 들린다.

학교는 이제 인성을 함양시킨다는 낡은 명분과 상급 학교 진학에 필요한 졸업장을 주는 기능 외에 많은 것들을 학원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는 결국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사범대 졸업생들의 성적은 짧으면 3년, 길어야 5년 이내로 뒤집힌다.

사범대 졸업 때 일류는 공립학교 교사로, 이류는 사립학교 교사로, 삼류는 학원으로 가는 게 보통이지만 개인의 경쟁력은 금새 역전되고 만다.

학부모들이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경쟁력이 높은 학원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단속하고 말려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그토록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때도 과외는 번연히 살아남지 않았는가.

고교 평준화를 유지하든, 해체하든 공교육을 담당한 교사와 교육관료, 교육부가 경쟁력을 갖지 않으면 결코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지금은 평준화를 해라 말아라 싸울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교육의 경쟁력을 사교육보다 높일 수 있는지, 사교육에 빼앗긴 공교육 본연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는지 모색하고 집중할 때다.

이같은 명제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개천에서 나는 용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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