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눈꽃산행

입력 2004-01-29 17:11:29

눈이 귀한 대구에 눈발이 날리는 듯 하더니 그저 흉내만 내고 만다. 강원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리는 등 눈 천지 세상이 열렸다는데, 분지의 시민들은 항상 눈을 그리워한다. 눈을 찾아 떠난다. 설산 산행의 대명사는 당연 태백산. 얼마전 눈꽃축제도 끝나 당골광장에는 진귀한 얼음조각도 많을 것이고 '살아천년 죽어천년'이라는 주목군락에 눈꽃이라도 피어 있다면 아쉬울 게 없는 산행이 될 것 같다.

유일사 등산로로 시작해 장군봉 천제단을 거쳐 당골광장으로 오르는게 가장 일반적인 코스지만 차를 가져간다면 아예 당골광장으로 가는 것도 좋다.

이른 점심을 먹고 단군성전을 왼편으로 끼고 난 등산로를 택해 천제단으로 오른다. 태백산은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다. 아직 신설이라 얼지 않고 밟을때 마다 '뽀드득 뽀드득'소리가 난다. 발밑에 전해 오는 눈 밟는 느낌, 온 신경을 곤두세워 즐긴다.

산길을 오르니 발 뒷꿈치부터 시작해 발가락 끝까지 눈을 밟게 된다. 일행이 있더라도 오히려 혼자 처져 신발밑으로 전해오는 눈의 느낌과 뽀드득 소리를 즐길만하다. 길가에 쌓인 눈을 한줌 쥐고 뭉쳐보니 신설이라 쉬 뭉쳐지지 않는다. 한 줌 눈이 밤알만한 눈덩이로 남는다. 10분쯤 오르니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위에 쌓인 눈은 또 다른 소리가 난다. 다리 밑에 있는 공간이 울림쇠 역할을 해 뽀드득 소리가 메아리를 치는 것 같다.

다리를 지나니 제법 가파른 길이다. 눈이 쌓여 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데 경사가 지니 지금껏 여유를 부리던 마음도 덩달아 긴장한다. 20분쯤 더 오르니 다리가 하나 더 나타나고 물이 마른 계곡 바위마다 하얀 모자를 쓰고 있다. 한낮의 겨울광선을 받은 계곡의 풍광이 아름답다. 다리를 지나면 계단이다. 능선에 오르기 전 10여분간 계속되는 계단 좌우의 소나무에 눈이 쌓였고 바닥은 순백의 융단을 깔았다. 산위에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나무에서는 하얀 낙엽이 솜처럼 내려 걷던 걸음을 절로 멈추게 한다.

능선 갈림길에 오르자 커피를 파는 산꾼이 있다. 알루미늄지게에 물을 지고와 각종 차를 끓여서 판다. 커피를 한잔 마시며 어묵을 팔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산위에서 따끈한 국물과 함께 어묵을 먹는다면? 생각만해도 꿀맛일 것 같다.

저만치 능선위가 시끌벅쩍하다. 50대 가까운 중년들이 한바탕 소란이다. 사람이 넘어졌나 싶어 자세히 보니 그 유명한 오궁썰매를 타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소리다. 동심으로 돌아간 중년이었다. 정상으로 오르면서 그 팀들을 만난다. '그렇게 즐거우세요?', '너무 재밌습니다. 눈썰매장에서야 어찌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겠어요?' 모두들 손에 비닐포대기를 들고 옷은 눈범벅이 되어 있다. 태백산 하산길은 모두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터를 잡고 있는 망경사에 도착한다. 시끌벅쩍하다. 일열로 들어선 법당앞에 많은 등산객들이 있다. 컵라면을 먹는 팀, 도시락을 먹는 팀, 마치 태백산 정상을 공략하기 전 마련된 베이스 갬프같다. 망경사 1,470m 고지에는 동해바닷물과 연결돼 있다는 용정이 있다. 역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물이다. 명수로 소문난 용정의 물을 마시며 발아래 펼쳐진 태백산을 본다. 봉우리들마다 눈을 이고 있다.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단종 비각을 오른다. 올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드는 비각앞에서 바라보는 망경사의 풍광이 그저 그만이다.

계단을 따라 오르니 장군봉이다. 1백여평 될법한 평지를 따라 온 사방이 산이다. 가운데 마련된 천제단에는 기도하는 보살과 등산객들이 북적인다. 장군봉에서는 온 사방이 눈산이다. 발아래 펼쳐진 눈쌓인 봉우리들의 연결이 마치 고색창연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하다. 훌륭한 계조를 가진 흑백사진은 현란한 색채를 지닌 컬러사진보다 오히려 감동적이다. 유일사쪽에 있는 주목군락지로 향한다. 눈꽃이 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주목은 그저 나신으로 서 있다.

흰 눈밭에 벌거숭이로 서있는 주목군락지에는 바람이 너무 세 어린 주목이 잘 자라지 못한다는 설명과 함께 나무로 만든 방풍막을 둘러놓았다. 저마다 다른 몸부림으로 오랜 세월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뎌낸 주목은 껍질만 남은 듯이 보여도 생명력을 가지고 짙푸른 잎새를 달고 있다.

오궁썰매를 위해 준비한 비료포대기를 한번 챙기며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간다. 군데 군데 내리막길이 벌써 반질거린다. 앞서간 등산객들이 여러번 미끄러져 갔던 길인가보다. 제법 급한 경사길인데 아이들은 겁없이 잘도 타고 내려간다. 비교적 안전해보이는 내리막을 골라 비료포대기를 엉덩이에 대고 타본다. 생각보다 빠르다. 저절로 비명이 나오고 마음은 동심으로 돌아간다. 봅슬레이를 연상케하는 코스도 있다. 태백산 산행은 그래서 가족과 함께 많이 오나보다. 부모가 같이 애들과 어울려 같은 또래가 되는 산행이다.

취재수첩

당골광장에는 지난 18일 끝난 눈조각 경연대회의 작품들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8m높이의 로마의 개선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칠레 이스트섬의 거대한 이누이 상, 진시황과 만리장성 등 거대한 눈조각품이 있고 당골광장밑에는 눈썰매장과 앉은뱅이 썰매를 대여해주는 간이 얼음 썰매장이 있어 어린이들과 함께가면 더욱 좋을듯.

시간이 허락한다면 태백시내 황지동에 있는 황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진 이곳에도 얼음조각 공원이 들어서 있다. 야간에는 조명을 설치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태백산 산행시 아이젠은 필수. 온 등산로가 눈으로 덮여 있어 아이젠을 벗을 일이 없다.

사진·글 정우용기자 sajah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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