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무색 도시

입력 2004-01-29 11:52:43

미국 자동차산업의 중심지는 중북부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시다.

GM, 포드, 다임러 크라이슬러 등 3대 자동차 메이커 본사가 여기에 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디트로이트는 잘 나가던 도시였다.

제조업 우위 시대의 미국 경제를 이끌며 한때 인구가 200만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딴 판이다.

옛 명성은 갈가리 찢어지고, 인구는 전성기의 절반 선으로 줄어들었다.

90년대 말 재개발의 기치를 높였으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2003년 조사에서 미국 350개 도시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곳으로 꼽힌 게 디트로이트이기 때문이다

늙은 제조업 도시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듯하다.

디트로이트와 東大阪의 명암

일본 히가시오사카(東大阪)는 인구 51만의 소도시다.

디트로이트와 마찬가지로 8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제조업 도시였다.

그러나 장기 불황 끝에 2천여 중소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중국으로 이전해 도시는 공동화됐다.

디트로이트의 재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도전적인 수습책이 제시됐다.

2001년 이곳 중소기업인들이 우주산업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2005년까지 소규모 인공위성을 띄워 히가시오사카를 일본 우주산업의 상징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접한 내외의 시각은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도전정신에 감명 받은 대학들이 기술 지원에 나서자, 일본 정부도 자금지원을 시작했다.

요즘 이 도시는 도시 재창조에 들떠 있다.

올해 대구는 새로운 변혁을 눈앞에 두고 있다.

4월의 고속철도 개통이다.

나라 전체로 보면 세계 5번째의 경사지만, 대구로 보면 재앙의 시작일 수 있다.

1970년 고속도로 개통은 대구를 '머무는 도시'에서 '통과하는 도시'로 격하시켰다.

서울의 흡인력이 제3의 도시 대구를 제4의 도시로 추락시켰다.

고속철도 개통은 고속도로 이상의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현재 4시간10분 거리인 서울~부산은 2시간 40분으로 줄어든다.

2010년 고속철도가 완전 개통되면 1시간 56분이다.

일본의 신칸센이나 프랑스 떼제베의 전례로 볼 때 서울의 통근권은 150~200km로 확대된다

대구와 서울간의 거리는 292km. 통근권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서울과의 시간장벽은 고속도로의 절반으로 줄어든다.

서울의 흡인력이 2배로 작용하게 된다는 말과 다름없다.

고속도로 개통 이후 30여 년 간 대구는 낮잠을 잤다.

새로운 성장의 엔진 없이 빈 껍데기 자동차만 몰아왔다.

그 결과가 교육 없는 교육 도시, 문화 없는 문화 도시, 섬유 없는 섬유 도시다.

무색(無色)도시가 된 것이다.

지도층의 무능과 지식층의 무책임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이 힘 빠진 도시에 이제 고속철이라는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걱정하는 목소리가 없다.

고속철 시대를 맞는 위기의식이나 몸부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흔한 토론회나 공청회 한번 접해보기 힘들다.

대구의 가장 큰 죄악은 무사안일이다.

이처럼 변화에 둔감한 도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유럽경제의 기관차인 독일이 10년 세월에 무너지는 판이다.

폭탄세일을 해도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지 않고, 대학생들은 휴학을 하며 취업을 대기하고 있다.

변화의 대응을 조금만 늦춰도 이런 꼴이 된다.

일본의 도시들이 생존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도 변화의 살얼음판 때문이다.

대마도에서는 부산자본을 끌어들이려 야단이다.

고속철 시대라는 눈앞의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는 대구의 무신경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지도에서 지워진 도시, 대구

이미 대구는 지도에서 반쯤 지워진 도시다.

바깥 세상의 변화를 외면한 채 우물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미국 관광지도에 부산과 광주는 있어도 대구는 없다.

이대로 눌러 앉아 있으면 디트로이트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고속철도의 태풍이 쇠락의 속도를 두 배로 앞당길 가능성이 크다.

인구는 줄고, 실업은 넘쳐나며, 도시는 무색에서 회색으로 바뀔 것이다.

더 이상 낮잠을 자서는 안 된다.

히가시오사카 같은 꿈을 만들어야 한다.

대구의 지붕을 수리하고, 대문을 고쳐보자는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당장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뭔가 움직임을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기대와 열정의 움직임속에서 답은 스스로 싹 틀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주체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역대 시장들이, 국회의원들이, 경제.문화.언론계가 무사안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뭔가 바꿔야 한다.

낡아빠진 리더십으로는 대구를 건질 수 없다.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를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하고 낯두꺼운 지도층을 몰아내야 한다.

개벽의 시각이 다가오는 데도 뒷짐만 지고 있었던 표 도둑들도 쫓아내야 한다.

열린 대구, 변화하는 대구의 주체세력을 새로 키워 꿈과 희망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진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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