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가 백지의 공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무슨 글을 어떻게 시작할까, 시작을 앞두고 조심스럽고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리라. 설교 원고를 시작할 때도, 청탁글을 쓸 때도, 여기 이 매일춘추 원고를 시작하면서도 매번 공감하고 있다.
설을 앞두고 한 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린 새로운 시작을 소망한다.
좀더 나은 한해, 좀 더 많이 누리는 한해, 좀더 사람다운 한해를 바란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우리는 사람의 한계를 확인하며 씁쓸해했던가.
중년이 되면 시작을 소망하기보다 제대로 된 마무리를 설계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손톱을 깎는데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안(老眼)이 시작되었단다.
처음 진단을 받은 2년 전 그 가을날은 저녁 먹은 게 그대로 체할 만큼 마음이 불편했다.
아직 시작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정리 단계로 들어가라 한다.
그 다음해 부활절 즈음에야 가라앉은 우울증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인생이란 게 이런 건가 하는, 예상보다 훨씬 짧고 단순하게 끝날 수 있는 인생을 인식하게 되면서 차라리 말수가 적어져 내적으로 깊어지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배우면서 즐거운 삶, 배운 대로 살면서 즐거운 삶이라면 과정도 목표도 구별이 없이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이겠다.
경대 북문에 가면 홍차전문찻집이 있다.
제대로 된 홍차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이나 상업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좋아서 오는 사람, 그 외에는 대개가 주인이 좋아서 오는 손님들이다.
가끔 새로 가게를 여는 사람들이 입소문을 통해 찾아와서 한 수 배우고 가기도 한다.
인도와 티베트에서 불교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젊은 주인은 소탈하면서도 진지하고 건강한 삶이 어떤 거란 걸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마치 부드러운 공기를 마시듯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억지나 꾸밈이 없는 마음이 공간이나 홍차 맛에 은은하게 배어 있어서 차 마시러 갔다가 정신까지 돌아보고 온다.
참 잘 배운 사람이다.
그리고 참 배운 대로 잘 사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공부를 했고, 그걸로 사회에서 노릇을 한다.
하지만 제대로 못 배워서인지, 아니면 배운 대로 살지 않아서인지 사람다운 사람이 귀한 딱한 세상이다.
새로운 시작보다는 잘 배운 걸로 잘 살고 싶어지는 중년의 세밑이다.
정금교(대구 만남의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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