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문인 허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요절을 아쉬워하는 문인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일찍 죽은 게 아니라 너무 일찍 태어났다.
조선은 그가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난설헌은 조선 땅에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 견딜 수 없는 슬픔 세 가지를 토로했다.
'첫째 조선에 태어난 슬픔, 둘째 여자로 태어난 슬픔, 셋째 하필이면 못난 자의 아내가 된 슬픔'이라 했다.
그의 세 가지 슬픔은 '조선 땅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교육받은 자신을 받아들일 그릇이 못되는 남편 김성립을 '못난 자'라 했다.
그럴까. 김성립의 집안은 5대에 걸쳐 급제한 문벌이다.
조금 늦었지만 그 또한 급제했다.
'못난 시대'에서 배우고 자란 사람은 누구라도 난설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성립을 '못난 자'라 나무랄 게 아니라 '못난 시대'를 탓해야 옳다.
진보적 사상가들인 실학파들도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이 끝없을 것'(이익,'성호사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난설헌은 결혼 전 이미 시문에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은 오빠는 난설헌이 학문적 담론에 끼여드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우리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오빠 허봉의 생각과 행동은 파격적이다.
난설헌과 그의 형제들은 시문을 배우는 데 있어 남녀의 차별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난설헌이 차별이 일반화된 사회를 견뎌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천재시인의 목을 조른 검은 손은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 남녀유별(男女有別)만이 아니었다.
친정집안의 몰락과 남편과 불화도 개인적인 불행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허봉, 허균 등 형제들의 자유분방함과 예술가적 기질은 그들을 역시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
허봉은 임금에게 직언을 고하다가 유배됐고 길에서 죽었다.
평등세상을 꿈꾸던 허균은 역모죄로 처형됐다.
불행한 여인 난설헌은 그러나 한편 행복한 여성이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를 친정과 시댁으로 두었다.
그 덕에 동시대의 여성들에 비해 많이 교육받고, 많이 누렸다.
그런 그에게조차 조선은 숨쉬기 힘든 세상이었다.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살다간 조선 여성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난설헌은 개인적 불행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창작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에는 유독 '꿈(夢)'이란 글자가 많다.
또 그의 시 213수 가운데 128수가 신선시였다.
난설헌은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정면충돌할 수도 없었다.
정면충돌대신 그는 꿈의 세계, 신선의 세계로 몸과 마음을 숨겼다.
신선 이야기와 판타지가 세인의 관심을 끄는 세상은 어두운 사회라 할 수 있다.
신선이야기나 판타지가 현실의 고통을 상상 속에 숨기려는 '도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난설헌이 숨어든 세계가 신선과 선녀가 노니는 세상은 아니었다.
남과 여, 신분의 귀천에 차별이 없는 평등 세상이었다.
본명이 허초희인 그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 호(난설헌)를 지어 부른 여성이다.
난설헌은 여자가 아니라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허망한 것이었다.
집 한 간에 가득 찰 만큼 시를 지었지만 그는 허난설헌이 아니라 이조판서 허성의 누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로 죽었다.
여성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관례에 따랐기 때문이다.
편견에 찬 조선사회의 눈에 인구 중 절반(여성)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참고자료: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황원갑). 허난설헌(김성남). 여인열전(이덕일). 한국역사를 뒤흔들었던 여성들(이문호). 국가지식정보통합검색 시스템.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신문.
-역사신문 사설은 역사적 사건 당시 오늘날과 같은 신문이 있었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생각해보는 난입니다.
◇알림=역사와 글쓰기는 4회에 걸쳐 '역사속의 여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허난설헌을 시작으로 역사속 여성의 삶과 사회문화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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